하얀마음 언어학
Alexander Vovin(2007) - Cin-Han and Silla Words in Chinese Transcription 번역 본문
Alexander Vovin(2007) - Cin-Han and Silla Words in Chinese Transcription 번역
La Espero 2019. 11. 18. 11:55이번에도 역시 알렉산더 보빈(Alexander Vovin) 교수의 논문으로, 제목은 Cin-Han and Silla Words in Chinese Transcription(한문으로 적힌 진한어와 신라어 낱말들)입니다. 고대 진한어는 일본어족에 가까웠으나 신라어로 갈수록 한국어족적 특성이 나타나게 된다는 주장을 하고 있습니다. From Koguryŏ to T'amna의 기존의 증거 부분에서 다뤄진 진한어와 신라어의 낱말들에 대한 분석에 관심이 있으시면 이 논문을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원문은 여기서 보실 수 있습니다.
참고사항 : 문맥에 따라 원문의 Japonic은 일본어족 혹은 일본어로, Korean은 한국어족 혹은 한국어로 옮겼습니다. 이때 한국어는 물론 현대 한국어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한국어족에 속하는 당대의 언어를 말하는 것이며, 일본어는 류큐를 포함한 현대 일본에서 사용되는 언어들뿐 아니라 본고에서 주장하고 있는 바와 같이 한국어의 침입 이전 시기에 한반도에서 쓰이던 언어까지 널리 포괄하는 뜻으로서의 일본어족에 속하는 특정한 언어를 가리키는 말로 쓰입니다. 또한, 접두어 Proto-는 한국조어, 일본조어 등과 같이 원시-보다는 -조어로 옮겼습니다.
참고사항2 : 한국어는 원문에서 로마자로 표기되어 있는데, 현대 한국어 지명은 매큔-라이샤워식을, 언어자료·사료명·인명은 예일식을 따르고 있습니다. 각 표기법에 대한 정보는 위키백과 등을 참고하세요.
참고사항3 : 이 논문의 요지는 일선동조론이니 내선일체니 임나일본부설이니 하는 식의 프로파간다와는 전혀 관련이 없습니다. 국적, 민족성, 혈통, 언어는 관련이 되어 있기는 하나 절대적인 것이 아닙니다.
* 본 번역은 원저자 Alexander Vovin 교수님의 허가를 받고 게재되었습니다.
한문으로 적힌 진한어와 신라어 낱말들
김진우 교수님의 은퇴를 축하드리며, 그의 논문 “한국어의 형성(The Making of the Korean Language)”을 인용하며 시작하고 싶다.
아시아 대륙의 주변부에 있어서, 한국과 일본은 모두 이주로의 끝에 있다. 남쪽을, 북쪽을 향한 두 이주 경로는 한반도와 일본열도에서 부딪쳤음에 틀림없다. 이 충돌에서 태어난 언어가 양쪽의 특성을 다 지니고 있다는 것은 결코 부자연스러운 관점이 아니다. (김진우 1974, 12)
학자들이 한국어와 일본어족을 알타이어족, 거대퉁구스어족, 아니면 거대 어쩌고에 처박아 넣는 것을 점점 거부하고 한반도와 일본열도에서 일어난 접촉에 더 집중하게 되면서, 거의 30년 전에 나온 이 논평은 최근 들어 점점 조명을 받고 있다. 한국어와 일본어의 발생 과정은 모두 결코 간단하지 않았으며, 분명히 이 두 어족 사이에서 다른 인접한 어족들과 마찬가지로 엄청난 상호작용이 일어났을 것이다. 기원후 1세기 초의 한국과 일본의 언어 지도는 현재의 국경과 같을 수가 없다. 한국과 일본은 아시아 대륙의 주변부에 있지만, 양쪽은 3~5세기의 대 이주에 영향을 받았고, 해당 지역에서 상당한 언어 전환이 일어났을 것이라 기대할 수 있다. 확실히 아직도 우리가 놓치고 있거나 지금껏 눈치 채지 못한 수수께끼들이 많이 있다.
본고에서는 최근 다른 분야에서 제시된 바와 같이(Unger 2005) 한국어가 한반도 동남부에 비교적 늦게 침입했다는 언어학적 증거를 제공하고자 할 것이다. 이를 증명하기 위해, 하기(下記)의 몇 줄에서 위지(魏志, 290년) 동이전(東夷傳)과 양서(梁書, 635년) 신라전(新羅傳)에 보존된 몇몇 낱말들을 다룰 것이다. 이 낱말들이 있는 위지는 잘 알려져 있지만, 논의를 위해 전문을 싣는다.
辰韓在馬韓之東, 其耆老傳世, 自言古之亡人避秦役來適韓國, 馬韓割其東界地與之. 有城柵. 其言語不與馬韓同, 名國爲邦, 弓爲弧, 賊爲寇, 行酒爲行觴. 相呼皆爲徒, 有似秦人, 非但燕, 齊之名物也. 名樂浪人爲阿殘, 東方人名我爲阿, 謂樂浪人本其殘餘人. 今有名之爲秦韓者. 始有六國, 稍分爲十二國.
진한(辰韓)은 마한(馬韓)의 동쪽에 있다. [진한의] 노인들은 대대로 전하여 말하기를, “[우리들은] 옛날의 망명인으로 진(秦)나라의 고역(苦役)을 피하여 한국(韓國)으로 왔는데, 마한이 그들의 동쪽 땅을 분할하여 우리에게 주었다.”고 하였다. 그곳에는 성책(城柵)이 있다. 그들의 말은 마한과 달라서 나라[國]를 방(邦, *pæwŋ)이라 하고, 활[弓]을 호(弧, *gwa)라 하고 도적[賊]을 구(寇, *kus)라 하고, 술잔을 돌리는 것[行酒]을 행상(行觴, *gæŋ *syaŋ)이라 한다. 서로 부르는 것을 모두 도(徒, *da)라 하여 진(秦)나라 사람들과 흡사하니, 단지 연(燕)나라와 제(齊)나라의 명칭만은 아니었다. 낙랑(樂浪) 사람을 아잔(阿殘, *ʔadzan)이라 하였는데, 동방(東方) 사람들은 나(我)라는 말을 아(阿, *ʔa)라 하였으니, 낙랑인들은 본디 그 중에 남아 있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지금도 [진한(辰韓)을] 진한(秦韓)이라고 부르는 사람이 있다. [진한은] 처음에는 6국(國)이던 것이 차츰 12국으로 나뉘어졌다. (위지 권 30, 852; 한국어 번역 출처)
대부분의 선행 연구자들은 이 자료가 제공하는, 진한어와 그의 서쪽 인접 언어인 마한어 사이의 관계에 관한 일반적 진술—其言語不與馬韓同 "그들의 말은 마한과 다르다"(위지 권 30, 852)—에 관한 논의에만 초점을 맞추었다. 사실상 진한어가 일종의 고대 한국어로 가정되었기 때문에, 학자들은 이 진술의 유효성을 반증하는 데 집중했다(이기문 1987, 31; 최범훈 1985, 59-60; 김무림 2004, 23-25). 주된 반론은 후한서에서 보이는 삼한에 관한 진술—弁辰與辰韓雜居城郭衣服皆同言語風俗有異 "변한과 진한은 함께(섞여) 살며, 성곽과 의복은 모두 같고, 언어와 풍속에는 차이가 있다."(후한서 권115, 9b)—에 기반을 두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에 따라 진한어와 변한어의 차이가 그리 크지 않았다면(곧 방언적 차이에 불과했다면) 위지의 진술이 다른 언어가 아닌 다른 방언을 나타내는 것으로 이해될 수 있는지 논쟁이 벌어지고 있다(김방한 1983, 100; 이기문 1987, 31). 이러한 추론은 두 가지 문제를 회피하고 있다. 첫째로, 위지에서는 진한과 마한의 언어적 차이에 대해 진술하고 있지만 후한서에서는 진한과 변한의 언어적 차이를 다루고 있다. 세 부족연맹이 이름에 한(韓)이라는 요소를 포함하고 있다고 해서 여기서 어떠한 언어학적 관계 이행성 원칙(principle of linguistic relationship transitivity)을 가정해서도 안 된다(다시 말해, 진한과 변한 사이의 차이가 진한과 마한 사이의 차이와 같은 관계일 것이라 가정해서는 안 된다는 뜻이다 - 역주). 둘째로, 범엽(范曄)의 후한서가 후한의 역사를 다루고 있지만 위지보다 200년 뒤인 5세기에 쓰였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더욱이, 간단한 문헌 분석을 통해 후한서의 삼한에 대한 기술에 위지에서 직접 인용한 구절이 들어 있음을 알 수 있다.
耆老傳世, 自言古之亡人避秦役來適韓國, 馬韓割其東界地與之. 有城柵. 其言語不與馬韓同, 名國爲邦, 弓爲弧, 賊爲寇, 行酒爲行觴. 相呼爲徒.
[진한의] 노인들은 대대로 전하여 말하기를, “[우리들은] 옛날의 망명인으로 진(秦)나라의 고역(苦役)을 피하여 한국(韓國)으로 왔는데, 마한이 그들의 동쪽 땅을 분할하여 우리에게 주었다.”고 하였다. 그곳에는 성책(城柵)이 있다. 그들의 말은 마한과 달라서 나라[國]를 방(邦, *pæwŋ)이라 하고, 활[弓]을 호(弧, *gwa)라 하고 도적[賊]을 구(寇, *kus)라 하고, 술잔을 돌리는 것[行酒]을 행상(行觴, *gæŋ *syaŋ)이라 한다. 서로 부르는 것을 도(徒, *da)라 한다. (후한서 권 115, 9b)
그렇지만 위지와 후한서의 언어학적 진술이 모두 옳다고 가정해 보면, 고대 한반도와 남만주 일대에 두 가지 다른 종류의 언어, 곧 부여어·고구려어·'귀족' 백제어를 포함하는 부여계 제어와 마한어('백성' 백제어)·진한어·변한어를 포함하는 한계 제어가 존재했다는 일반적인 관점(이기문 1987, 29-38)과 충돌하게 된다. 흔히 선주민들은 일본어족과 연관되어 있었으며 한국어는 나중에 들어온 것이라고 가정된다. 이 관점은 두 가지 가정에 의해 지지되고 있는데, 고구려어가 근본적으로 대륙에 있었던 일본어족계 언어라는 가정과 백제에는 일본어족과 관련 있는 '귀족' 백제어와 한국어와 관련 있는 '백성' 백제어의 두 언어가 있었다는 가정이다(河野六郞 1987).
그러나, 최소한 고구려어 자료의 해석에 관해서는 반대되는 관점도 있다. 삼국사기 권 35와 권 37에 기록된 고구려 지명은 매우 혼합되어 있다. 몇몇 지명은 일본어처럼, 몇몇은 한국어처럼, 몇몇은(아주 적은 수지만) 퉁구스어처럼 보이며, 알 수 없는 언어로 되어 있는 것도 있다. 고구려의 전 인구, 최소한 지배층은 일본어족에 속하는 언어를 말했다는 증거로 지명에서 나타나는 일본어족적 부분의 해석을 채택하고 있는 지배적인 관점(村山七郎 1963; 이기문 1963, 1981; Beckwith 2004 등 다수) 외에, 고구려 지명의 일본어족적 요소는 고구려 이전의 기층 언어를 나타내고 있는 것이라는 또 다른 관점(김방한 1983; 김주원 1993, 240-61; Janhunen 1996; 馬淵和夫 등 2000, 521-679; 송기중 1999 등 다수)도 있다. 저자는 최근에 삼국사기 기록이 아닌 고구려어 자료를 분석하고 백제어 자료를 재고(再考)한 논문을 통해 고구려어의 일본어족적 특성과 고노의 백제 양층언어 가설이 지지될 수 없음을 증명한 바 있다(Vovin 2005b). 저자는 부분적으로 두 번째 관점에 기울어 있기는 하나, 두 관점 모두 다른 정도긴 하지만 문제가 있다. 첫 번째 관점은 한국어 화자가 먼저 도착했고, 부여어·고구려어와 관련이 있는 강력하고 지배적인 일본어족 화자 집단이 나중에 도착했다는 한반도로의 이주 순서에 대해 말하기를 유보하고 있다. 옛 고구려 땅에서 일본어처럼 보이는 지명이 어디로 가버리는 건 아니지만, 이것들이 고구려 수백 년 이전의 지명이 아니라 고구려어로 된 지명이라는 증거는 어디에 있는가? 다른 말로 하자면, 이 지명들은 고구려의 한국어 화자들에게 지배당한 다른 일본어 화자 집단에 속한 것이라 가정하지 못할 이유는 무엇인가? 백제 왕실이 고구려에서 왔다는 역사적 사실은 잘 알려져 있다. 하지만 이것이 백제 지배층이 일본어계 언어를 말했다는 증거로 충분한가? 고노가 증거로서 제시한, '귀족' 백제어에서 일본어처럼 보이는 낱말들은 증거로서의 가치가 없고, 고대 일본어의 백제어 차용어는 모두 한국어계다(Vovin 2005b: 119-32).
두 번째 관점의 잘못은 작지만, 그것의 약점은 한국어가 태곳적부터 한반도 어디에서나 말해졌다는 가정 위에 놓여 있다. 저자는 오직 부분적으로만 이 관점에 동의하는데, 삼국시대에 이르러서는 한반도에서 한국어만 말해졌다고 가정하는 것만이 합당하다(Vovin 2005b, 134)(곧, 삼국시대가 시작되기 전에 한반도에서 다른 언어가 말해졌을 가능성을 무시하면 안 된다는 뜻이다 - 역주). 다음 약점으로는 뒤에서 보이겠지만 신라로 이어진 진한의 영토에서 한국어만 말해져 왔다는 가정을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이고 있다는 것이 있다. 이는 삼국시대 후기에는 분명히 맞는 말이긴 하나 위에서 인용한 위지의 구절에서 발견한 진한과 마한(후의 백제) 간의 언어적 차이에 대한 중국 문헌의 관점과는 일치하지 않는다. 그렇지만 Unger가 최근에 제시한, 한국어는 한반도 동남부에 나중에 들어온 침입자로서 일본어족과 관련된 언어를 밀어냈다는 이론(Unger 2005)을 통해 (두 번째 관점과 위지의 진술은 - 역주) 조화될 수 있다. Unger의 역사학적 논증은 아주 설득력 있지만, 그는 그의 관점을 뒷받침할 언어학적 근거는 제시하지 않았다. 다음 몇 줄에서는 고대 중국의 자료를 통해 3세기에서 6세기 사이에 한반도 동남부에서 언어 교체가 발생했다는 사실을 증명함으로써 Unger의 관점에 대해 언어학적 증거를 제시할 것이다.
진한과 마한의 언어가 달랐다는 위의 위지 구절에만 의존하지는 않아야 함은 명백하다. 역사에 관한 한 위의 위지 구절은 부정확한 진술로 가득하다. 진한이 진나라의 노역을 피해 이곳으로 온 중국인들의 나라였다는 것은 분명 믿기 힘들다. 그와 같이, 진한의 동부에 한사군의 하나로 한반도 서북쪽에 있었던 낙랑의 주민이 조상으로서든 친척으로서든 있었다는 것도 말이 안 된다. 이 구절은 한문으로 전사된 몇몇 진한어 낱말을 담고 있기 때문에, 아래에서 이 구절 속의 언어학적 증거들에 대해서 다루어볼 것이다.
- 진한에 대해 위의 위지 구절과 다른 중국 문헌들에서 辰韓과 秦韓의 두 가지 표기가 쓰인 것은 전기 중고 한어 발음이 辰 *dzyin과 秦 *dzin으로 비슷했기 때문으로 볼 수 있다.
고노의 논문 이래로(河野六郞 1957, 177) 이 구절에서 인용된 낱말들 대부분이 관습적으로 중국어로 다루어지고 있다(김방한 1983, 100; 박병채 1989, 44; 김무림 2004, 24). 표면적으로 이들은 완벽하게 중국어로 보인다. 하지만 이들이 한문 준(準)훈차 표기에 가린 고유어 낱말이 아니라 실제 중국어가 맞는가? 중국인들은 '오랑캐' 언어들을 음차뿐 아니라, 가끔씩 음성적 정확성을 훼손해가며 훈차로도 표기했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다. 잘 알려진 예로는 흉노를 표기한, '흉한 노예'라는 뜻의 *xrjong-na(凶奴)가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장의 정확성을 위해서는 위의 위지 구절에 있는 낱말들이 고유어와 관련되며, 의심되는 중국어 어원과는 관련이 없음을 증명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 구절에는 준훈차가 아닌 순수한 음차 표기로 되어 있는 고유어 낱말이 두 개가 있다.
- 이 단어들이 중국 북방어에서 발견된다고 고노보다 먼저 주장한 사례도 있다(Parker 1890, 209, footnote 92). 아래에서 보이는 바와 같이, 이 방언적 연관에 대한 주장은 근거가 아예 없고, 진(辰)과 진한(辰韓)을 고대 중국 서북부에 있었던 중국 진(秦)나라와 혼동한 데서 비롯한 것으로 보인다.
- 훈족의 그리스어 이름 Φρονοι/phronoi/(/froni/가 음성학적으로 더 정확하다.)를 참고해 보라. 고대 중국어에는 자음군 *pr-가 있었기에, 의미적 이유로 전사의 정확성이 희생된 것을 볼 수 있다.
東方人名我爲阿
동방 사람들은 나라는 말을 아(阿, *ʔa)라 한다. (위지 권 30, 852)
여기서 1인칭 단수 대명사 *a(阿, 상고 한어 및 전기 중고 한어 *ʔa)를 얻을 수 있는데, 이는 중세 한국어 na와는 양립할 수 없다. 말할 필요도 없이 이 낱말은 중국어 어원도 없다. 어원은 현실적으로 일본조어 *a '나' > 고대 서부 일본어 a, 고대 동부 일본어 a, 고대 류큐어 a, 세소코어 'a, 요나구니어 'anu '나'(Vovin 2005a, 234-42)에 있을 것이다. 이로부터 진한 일본어 *a '나'를 재구할 수 있다.
名樂浪人爲阿殘
낙랑 사람을 아잔(阿殘, *ʔadzan)이라 한다. (위지 권 30, 852)
종족 명칭의 어원을 찾고자 하는 노력은 언제나 본질적으로 위험하지만, *ʔa(阿)가 1인칭 단수 대명사라는 것과, 동(東)진한 사람들이 낙랑 사람들이 원래 그들 중에 남아 있는 사람이라 한 구절(謂樂浪人本其殘餘人)에 의거해 *ʔadzan(阿殘)이 '우리 중에 남아 있는 사람'이란 뜻이라 가정하는 것은 더 위험하다. 위에서 이미 언급한 것처럼 한반도 서북부의 한사군은 남쪽 깊숙이 진한 영토까지 뻗어오지는 못했기 때문에, 낙랑의 중국인들이 진한인의 '남아 있는 사람'이 될 수는 없다. 그렇지만 권력이 있는 집단에 소속되고자 하는 욕구에 대해 생각해 보아야 한다. 진나라의 노역을 피해 한국 동남부 구석으로 이주해온 중국계 도망자와 자기들을 연관시키고 있는 진한 노인들의 이야기의 기저에는 이러한 바람이 반영되어 있을 것이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한반도의 한사군은 서한 시대에만 설치되었던 것을 잊지 말아야 하는데, 여기서 중대한 시간적 차이에 직면하게 된다. 이 모든 것에서, 낙랑 사람을 가리키던 *ʔadzan(阿殘)은 실제로 고유어 낱말을 반영하고 있는 것이라 기대할 수 있다. 처음으로 비교해볼 수 있는 것은 중세 한국어 àcó-, àcón-, àchón-인데, 중세 한국어 àcó-pá-(:nim) '아저씨' < *àcó-àpá-(:nim) '방계-아빠-(존칭)', àcó-mà-(:nim) < *àcó-èmà-(:nim). àcó-mí-(:nim) '아주머니' < *àcó-èmí-(:nim) '방계-엄마-(존칭)', àcón-àtòl ~ àchón-àtòl '남자 조카' < *'방계 아들', àchón-stól '조카딸' < *'방계 딸' 등에서 보이는, 방계를 나타내는 준(準)접두어이다(유창돈(1964), “이조어 사전” 520-21; 남광우 1997, 1004, 1006). 중세 한국어 àzóm '친척'(이조어 사전 519; 남광우 19975, 1011)도 위의 예시들과 연관이 있을 것인데, 중세 한국어 -z-는 때때로 한국조어 *-s-뿐 아니라 *-c-도 반영하기 때문이다. 중세 한국어 àcó-, àcón- '방계'와 àzóm '친척'이 정말 연관되어 있다면, 중세한국어의 명사화 어미 -m과 직설법 한정형 어미 -n라는 형태론에 의거하여 고어형 동사 *aco-[aʒʌ-] '방계친척이다'를 얻을 수 있다. 결론적으로, *ʔadzan(阿殘)을 고대 한국어 *aʒʌ-n '방계친척'으로 분석할 수 있다. 이는 낙랑군의 중국인들과 자신들을 연관시키고자 했던 진한 노인들의 바람을 만족시켜주었을 것이며, 동시에 한국어 어근과 형태론에 의거한 설득력 있는 어원을 제시해 주고 있다.
일본어에 속한다는 것을 강하게 시사하는 대명사 하나와 어휘·형태론적 자료에 의거하여 한국어에 속한다는 것을 강하게 시사하는 다른 낱말 하나, 이 둘이 모순이 아닌가 생각할 수도 있다. 이 모순을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이 있음을 증명할 것이기 때문에, 독자들은 조금만 인내심을 가져주기 바란다. 다음으로 논의할 어휘 항목은 고노 로쿠로의 중요한 논문에서 진한어 속의 중국 차용어로 여겨진 것이다(河野六郞 1957, 177). 위에서 인용한 위지 구절에 나온 순서대로 논의해볼 것이다. 다음의 낱말들을 중국어로 보는 것의 주된 문제점은 그것들이 위의 위지 구절에서 제시된 진(秦), 연(燕), 제(齊) 중 어떤 곳의 방언과도 맞지 않는다는 것이다.
- 아래에서 보인 중국어학적 통찰에서 동료 Wolfgang Behr 교수에게 엄청난 빚을 졌다. 말할 필요도 없이, 실수가 있다면 그것은 전적으로 내 탓이다.
名國爲邦
나라를 방(邦, *pæwŋ)이라 한다. (위지 권 30, 852)
고노 로쿠로는 *kwïk(國) 대신 *pæwŋ(邦)을 쓴 것은 한고조 유방(劉邦)을 피휘(避諱)했기 때문으로 보았다(河野六郞 1957, 177). 고노의 주장에 있는 주된 문제점은 한대(漢代) 이전에도 *pæwŋ(邦) '봉토, 도시국가, 국가'는 드물게 나타나고 *kwïk(國) '나라'가 주로 쓰인 데 있다. *pæwŋ(邦)는 아마, 열도 일본어에서 기대되는 마지막 자음 탈락이 나타난 형태인 고대 서부 일본어 pê '근처, 장소', 고대 동부 일본어 -N-pï '-의 쪽'과 비슷한 일본어 낱말을 적은 것이 아닐까 의심스럽다. 가능한 동계어로는 kumo-fe-tithe '하늘 꼭대기(구름-쪽-꼭대기)'(오모로소시 권 20, 1362)에서 나타나는 고대 류큐어 -fe '쪽'(外間守善 등 1995, 255)이 있다. 이 낱말이 때때로 류큐 조어 *e를 보존하고 있는 고대 류큐어에서 문증되므로 확실히 동계어긴 하겠지만, 다른 류큐 방언에서 증거가 부족하기 때문에 일본 본토로부터의 차용어 형태일 수도 있다. 일단은 진한 일본어 *pe(ŋ) '나라'를 재구할 수 있겠다.
- -N-pï는 yama-N-pï(夜麻備) '산쪽'(만엽집 권 14, 3557)에서만 확인된다.
弓爲弧
활을 호(弧, *gwa)라 한다. (위지 권 30, 852)
弧 자가 한어에서도 활을 뜻하기 때문에, 보통은 단순하게 중국어 차용어로 생각된다(河野六郞 1957, 177; 박병채 1989, 44; 김무림 2004, 24). 아래 내용은 Wolfgang Behr 박사와의 개인적인 대화에 따른 것이다.
弧는 아마도 진짜 선진시대(先秦時代; pre-imperial) 낱말이 아닐 것이다. 역경(易經)에서 활이라는 뜻으로 쓰이긴 하지만, 다른 선진시대 문헌이나 명문에서 나타나지 않는다. 서한시대에는 弧와 弓의 용법에 차이가 없긴 하지만, 후대의 사전편찬자들은 모두 弧는 쇠, 옥 등에 대비하여 나무 활[木弓]을 가리키는 것이라는 데 동의한다. 그러나 몇몇 청나라 문헌학자들에 따르면 목궁(木弓)은 재료가 아니라 모양에 따른 것으로, 弓은 단순한 C자형을 가리킨 반면 弧는 '뿔이 있는', '장식할 수 있는' 활(곧, 끝이 굽어서 의식용 깃발을 달 수 있는 활)을 뜻했다. (Wolfgang Behr, 개인적인 대화)
또한 弧가 瓜(오이 과, 전기 중고 한어 *kwæ, 상고 한어 *kwra), 狐(여우 호, 전기 중고 한어 *hu, 상고 한어 gwa)와 같은 해성(諧聲, 육서 가운데 형성과 같은 말로 뜻을 나타내는 부분과 음을 나타내는 부분이 합해져 새 글자를 만드는 방식 또는 그런 글자 - 역주)에 속한다는 사실도 상기해보자. 이 진한 고대 한국어 낱말은 따라서 *hwa가 될 수 있겠으며, 이는 중세 한국어 hwàl과 아주 비슷하다. 마지막 -l [-r]의 부재는 쉽게 설명될 수 있는데, 후기 상고 한어에는 *-r가 없었기 때문이다.
賊爲寇
도적을 구(寇, *kus)라 한다. (위지 권 30, 852)
賊과 寇의 대립에는 어떠한 개별 방언적·지리적 특성도 없다.
몇몇 오래된 주석에는 寇는 도둑이고 賊은 살인자라고 되어 있긴 하지만, 많은 문헌들에서는 둘을 동의어로 다루고 있고 복합어처럼 쓰기도 한다. (장가산(張家山), 수호지(睡虎地) 등에서 발견된) 진대(秦代) 법제죽간(法制竹簡) 등의 오래된 문헌에서 賊은 '범죄'를 뜻하는 명사로 쓰일 때는 보통 盜賊과 같이 결합하여 나타나는 반면 '사악하게', '부정하게' 따위 뜻의 부사로 쓰일 때는 홀로 쓰인다. 寇는 때로 홀로 쓰여 이러한 법률 문헌에서 '외국의 약탈자, 적군' 등을 뜻하는데, 가끔 합성어 寇賊 '범죄자들, 도적들'에서 가리키는 뜻과 차이를 알 수 없을 때도 있다. (Wolfgang Behr, 개인적인 대화)
따라서 다시 한 번 寇가 상고 한어의 진, 연, 제 방언에 속한다는 것을 뒷받침해줄 증거가 사라졌다. 여기서 이 고유어 낱말이 준훈차 표기된 것은 아닐까 하는 타당한 질문을 하나 할 수 있다. 가능한 어원으로는 중세 일본어 kuse '무례한 부류, 범죄, 사기꾼, 불의'가 있다. (근대 일본어 kuse-mono '범죄'에서 의미론적 발달을 볼 수 있다.) 이로부터 진한 일본어 *kus '도적'을 재구할 수 있다.
行酒爲行觴
술잔을 돌리는 것을 행상(行觴, *gæŋ *syaŋ)이라 한다.
원문의 해석은 여기서는 흠잡을 데가 없는데, 行 ‘돌리다’가 양쪽에서 나타나고 있기 때문이다. 한문의 酒 ‘술’과 진한어의 觴 ‘술잔’ 사이의 차이점은 작아 보이지만, 표현의 진위성에 의문을 제기하도록 한다. 따라서 여기서도 준 훈차 표기에 숨은 고유어를 다룰 수 있는 가능성이 존재하는 것이다. 먼저, 중국어의 SVO 어순을 일본어나 한국어의 SOV로 바꾸어야 하며, 이를 통해 行에 술이라는 뜻을, 觴에 (술을) 따른다는 뜻을 부여해볼 수 있다. *gæŋ(行)은 고대 서부 일본어 kï의 동계어로 여겨질 수 있다. 고대 서부 일본어 kï는 *kə-i와 *ku-i의 두 가지 조어형에서 유래할 수 있는데, *ku-i에 대해서는 설득력 있는 비교를 해볼 수 없지만 *kə-i에 대해서는 가능하다. 열도 일본어에서는 모든 마지막 자음이 자연스레 탈락한다. 무라야마는 또한 경칭 접두어 mî-가 후행 단어의 어조를 자동적으로 높이므로, 고대 서부 일본어 kï ‘술’이 저조(低調)였을 가능성도 언급하고 있다(村山七郎 1988, 253). 저자가 服部四郎(1978-79), 島袋盛世(2002)에 기반을 두고 최근에 증명한 것처럼, 저조는 선(先)일본조어 첫 음절에서의 모음 길이뿐 아니라 유성 자음도 반영할 수 있으므로, 원래의 모음 길이와 단음절어의 유성 여부를 구분해줄 증거가 없긴 하지만, 최종적은 조어형은 *gə-i가 될 것이다. *syaŋ ‘따르다’에 대한 가능한 어원론으로는 달리 증명되지 않은 동사 *san[V]- ‘*선물하다’와 tukë- ‘더하다, 붙이다’로 구성된 2형태소어에서 기원한 것이 분명한 고대 서부 일본어 saNtukë- < *san-tukë- ‘하사하다’가 있겠다.
- 일반적으로 kï는 사전에서 갑류 모음 /î/를 갖는 kî로 확인된다(時代別国語大辞典 235; 岩波古語辞典 349). 그러나 무라야마 시치로는 (時代別国語大辞典 235, 岩波古語辞典 349에서도 인정하는 바와 같이) kurô kï ‘검은 술’, sirô kï ‘흰 술’ 등에서 보이는 것처럼 선행 모음 /î/를 갖지 않는 수식 형용사 뒤에서는 을류 모음 /ï/를 갖는 반면, 경칭 접두어 mî- 뒤에서만 갑류 모음 /î/을 갖는다는 사실에서 이것이 분명한 모음 동화라는 것을 설득력 있게 증명했다(村山七郎 1988, 251-52).
相呼爲徒
서로 부르는 것을 도(徒, *da)라 한다.
진한 부족민들이 철학 학교에 속해서 서로 ‘제자’(徒)라 불렀다는 것은 지극히 비현실적이다. 徒는 그보다는 2인칭 대명사를 전사한 것으로 보인다. 중세 한국어 ne는 이것과 분명히 맞지 않기 때문에 중세 한국어에서 대응형을 찾을 수는 없다. 한편 일본어족의 류큐어 분지에서 2인칭 단수 대명사는 하테루마어 daa, 요나구니어 Ndaa, 시토이어 daa로 이와 유사하다(平山輝男 1966, 303; 1967, 241). 이 낱말은 류큐어에서도 널리 퍼지지 못했지만, 남류큐어와 북류큐어에서 모두 발견된다는 사실에서 류큐조어에 이 날말이 존재했을 것이라 생각해볼 수 있다. 이는 Thorpe가 재구한, 류큐어에서 더 널리 퍼진 2인칭 단수 대명사 *Ura(Thorpe 1983, 352)와는 분명히 연관되지 않은 것이다. 하테루마어 daa, 요나구니어 Ndaa, 시토이어 daa에서 류큐조어 *Ndaa ‘너’를 재구할 수 있다. 선(先)비음화된 *Nd-를 한자로 적을 때 *d-로 전사한 것은 자연스러운 선택이었을 것인데, 3세기 중국어에는 선비음화 파열음이 없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진한 일본어 *da ‘너’를 재구할 수 있다.
- 몇몇 현대 한국어 방언과 특히 육진 방언에서 이 2인칭 대명사의 첫 자음을 /ndɔ/나 심지어 /dɔ/로 탈비음화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런 현상이 고대 한국어는커녕 중세 한국어에도 있었다는 증거는 없다. 더욱이, 모음도 잘 맞지 않는다.
- 平山輝男(1966, 303)에서 요나구니어 형태는 류큐어 ya ‘너’의 정규 대응으로 여겨질 수 있는 da로 주어지지만, 平山輝男(1967, 241)에서는 Ndaa로 주어지며, 이는 (池間苗 1998, 357)에서도 뒷받침된다.
- 류큐조어 *Ura는 고사기와 일본서기에서 몇몇 예시들로 문증되는 고대 서부 일본어 ore ‘너’(時代別国語大辞典 上代編 169)와 동계어인 것으로 보인다.
- 최종적으로 류큐조어 *Ndaa는 **m/nVta와 같은 형태로 거슬러 올라갈 수 있겠지만, 이 축약의 연대도 알 수 없을뿐더러 내적으로 확인할 만한 증거도 없다.
- 다른 가능성으로 고대 서부 일본어 ora와 류큐조어 *Ura ‘너’를 관련지을 수 있는데, 이 경우 진한어 형태가 현대 레지마 방언 ra ‘너’(平山輝男 1966, 303) < 류큐조어 *Ura와 유사한 음운 변동을 거쳤다고 가정해야 한다. 일본어족 /r/은 탄설음으로, 특히 선(先)성문음화되는 경우에 *d-의 탄설음으로의 전환은 자연스럽다.
위에 적은 중국어처럼 보이는 진한어 낱말의 어원을 옳게 추측했다면, 매우 재미있는 그림을 그려볼 수 있을 것이다. 밝혀낸 진한어 낱말들은 일본어계와 한국어계가 섞여 있는데, 흥미로운 분포를 보이고 있다. 일본어계 낱말은 인칭 대명사, 중요하지 않은 기초어휘, 문화어휘이고, 한국어계 낱말은 형태론적 표지 하나를 포함하여 중요하지 않은 기초어휘와 문화어휘이다. 일본어처럼 보이는 인칭 대명사는 한국어보다는 일본어에 속한다는 쪽의 손을 들어주기 때문에(인칭 대명사가 일본어처럼 보이므로 진한어가 한국어보다는 일본어와 계통적으로 연관되어 있을 가능성이 높다는 뜻임 - 역주), 이런 분포는 일본어계 언어에 한국어계 언어가 강하게 스며든 것이라는 언어학적 상황을 시사해준다. 다른 말로 하자면, 진한어 낱말은 일본어에서 한국어로의 언어 교체의 시작을 반영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 시점에서 Unger가 주장한, 한국어는 한반도 동남부에서 일본어족과 관련된 언어를 몰아내고 성공적으로 침입한 언어라는 가설(Unger 2005)을 상기해볼 필요가 있겠다. 이는 위에서 이미 말한 바 있다. 후한서에서도 이 관점에 대한 추가적인 역사적 증거를 발견할 수 있다.
馬韓最大共立種爲辰王…三韓之地其諸國王馬韓種人焉
마한이 [삼한 중에서] 가장 강대하여 그 종족들이 함께 왕을 세워 진왕(辰王)으로 삼았다. … [삼한의] 여러 국왕의 선대는 모두 마한 종족의 사람이다. (후한서 권 115, 9a; 한국어 번역 출처)
이 구절에서 마한왕이 진한의 백성들을 다스렸다고 한다. 이는 또한 마한(한국조어 화자)이 남쪽으로 성공적으로 침입하여 지역민들을 예속시켰다는 시나리오를 뒷받침해주고 있다. 하지만 역사학적 증거의 이점이 무엇이든, 위에서 언급한 진한어에 대한 사료보다는 나중에 적혔고 7세기 초에서 8세기의 것으로 추정되는 고대 한국어의 신라 방언으로 적힌 첫 문헌(신라 향가)보다는 앞선 언어학적 자료를 인용하고 있는 중국 사료도 살펴보아야 한다. 위에서 이미 후한서는 위지의 기록을 반복하고 있을 뿐이라는 것은 보였다. 하지만 뒤에 적을 당 이전의 사서들에서는 그렇지 않은데, 몇몇은 이미 '신라'라 불리는 영토의 언어에 대한 항목이 존재했다. 아래에서 이 사서들에 있는 언어학적 자료들을 연대순으로 인용한다.
- 연대가 가장 빠른 향가 중 하나인 서동요는 아마 6세기 후반의 것으로 보이지만(홍기문 1956, 28), 신라가 아닌 백제에서의 고대 한국어 변이형을 적은 것으로 보인다(Vovin 2005b, 132-34).
648년 당나라 때 지어져 225년에서 420년의 일들을 기록하고 있는 진서(晋書)에는 진한에 관한 짧은 절(節)이 하나 있는데, 위지에 담긴 정보를 부분적으로 반복하고 있는 것이다. 그 이외에는 진한어 낱말에 대해서 수록하고 있지 않다.
그보다 1세기 앞선 551년에서 554년 사이에 지어져 386년에서 535년의 일들을 기록하고 있는 위서(魏書)에는 진한어나 신라어에 관한 내용이 없다.6세기 초반에 지어져 420년에서 479년의 일들을 기록하고 있는 송서(宋書)에는 진한어나 신라어에 관한 내용이 없다.
635년 당나라 때 지어져 502년에서 557년의 일들을 기록하고 있는 양서(梁書)에는 신라어에 관한 절이 하나 있는데, 몇몇 고유어 낱말들을 담고 있다.
- 양서에는 여기서 분석하지 않은 다른 호칭들도 전사되어 있다.
其俗呼城曰健牟羅, 其邑在內曰啄校勘, 在外曰邑勒… 其冠曰遺子禮, 襦曰尉解, 袴曰柯半, 靴曰洗
그 습속에 왕성(王城)을 건모라(健牟羅, *gjʌn *mu *la)라 부르며 그 읍(邑)이 [건모라의] 안에 있는 것은 탁평(啄評, *træwk *bjæŋ)이라 하고, 밖에 있는 것은 읍륵(邑勒, *ʔip *lʌk)이라 한다… 관(冠)을 유자례(遺子禮, *ywij *tsiʔ *lejʔ)라 하며, 저고리[襦]를 위해(尉解, *ʔjuh(? *jut) *kɛɨh(? *kɛɨʔ)), 바지[袴]를 가반(柯半, *ka *panh), 신[靴]을 세(洗, *senʔ)라 한다. (양서 권 54, 805-06; 한국어 번역 출처1, 출처 2)
健牟羅 *gjʌn *mu *la ‘성’에서 *mula(牟羅)는 고대 서부 일본어 mura ‘마을’(時代別国語大辞典 729), 류큐조어 *mura ‘마을’(平山輝男 1966, 313)을 통해 일본어족으로 분명하게 확인될 수 있다. 중세 한국어 mòzòlh ‘마을’과 비교하려면 (이조어 사전 286; 남광우 1997, 621) 심각한 음성학적 문제와 직면해야 하기 때문에 포기하는 편이 낫다. *gjʌn(健)을 중세 한국어 khún ‘큰’과 비교하려는 노력도 있는데, 이는 鞬吉支 /kənkirči/ 속의 백제어 鞬 *kən을 중세 한국어 khún으로 본 고노의 제안에 따른 것이며(河野六郞 1987, 78ff), 따라서 健牟羅 *gjʌn *mula ‘성’은 한국어-일본어의 혼성인 *khú-n mura ‘큰 마을’이 된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gjʌn(健)을 중세 한국어 khún ‘큰’으로 보는 것에는 몇 가지 문제가 있다. 먼저, 이기문도 지적했듯이 중세 한국어 khú-는 계림유사에 黑根(계림유사 #348)으로 기록된 전기 중세 한국어 huku-n의 축약형이다(이기문 1991, 18). 곧, 전기 중세 한국어 형태 huku-n을 알고 있는 상황에서 6세기 신라어에 중세 한국어와 같은 축약형이 존재했다고 가정하는 것은 시대착오적이다. 둘째로, 전기 중세 한국어에는 기식음 /kh-/가 분명히 존재했기 때문에 (이것을 전사하기 위해 - 역주) /g-/를 선택했다는 것은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아마 *gjʌn(健)은 다른 일본어 낱말을 적은 것으로 보이는데, 고대 서부 일본어 kï '성'에 계사n-의 불완전활용 한정형 n[-ə]가 붙은 형태를 상정할 수 있다. 그런데, 고대 서부 일본어 kï는 일본어족 고유어로 본 고노의 견해(河野六郞 1987, 82)와 달리 근본적으로 어떤 한국어 변이형이나 다른 내륙 아시아 언어에서 차용한 것으로 보인다(Vovin 2005b, 125). 고대 서부 일본어 kï는 저조에 속하여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선(先)일본조어에서 어두 유성음 *g-로 재구될 수 있다. 따라서 전체 健牟羅 *gjʌn *mu *la '성'은 모두 일본어족 요소로 이루어진 낱말로서 *gï n[-ə] mura '성 계사(한정형) 마을' 곧 '요새화된 마을'로 분석할 수 있겠다.
- 그건 그렇고, 고노가 백제어 鞬吉支 /kənkirči/ '왕'을 kə-n kirči '큰 사람'으로 분석한 것에도 의문을 제기할 수 있다. 올바르게 형태소를 분리하면 *kunku-r či '큰 사람'이 될 것이다. 이 분석에 대한 더 자세한 논의는 다른 논문에서 따로 다룰 것이기 때문에, *kunku-r이 연음화하지 않은 -k-가 *-nk-로 재구된다는(Vovin 2003, 101) 것에 대한 추가적인 증거가 된다는 점만 간략하게 언급하겠다. 고노는 일본서기에 가나로 채록된 백제어 koni '큰'(일본서기 권 9, 257; 권 11, 310; 권 14, 377; 권 24, 190, 197)도 추가적인 증거로서 인용하였다. 저자는 원래 백제어가 중세 한국어와 같은 축약을 거쳤을 수 있다고 여겨(Vovin 2005, 131) 고노의 생각에 동의하였으나, 지금은 일본어 가나로 전사된 백제어 koni는 C1C2 조합에서 C2의 손실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본다. 곧, (백제어를 가나로 전사하면서 - 역주) kənku- > kənu-가 되었다는 것이다.
*træwk *bjæŋ(啄評) '성내 읍'도 일본어족 낱말 *take pê '높은 쪽'으로 보인다. 고대 서부 일본어 taka '높은'(時代別国語大辞典 409), 고대 동부 일본어 taka(水島義治 1984, 809), 류큐조어 *taka-(平山輝男 1966, 426), 고대 서부 일본어 pê '인근, 주변, 장소, 쪽', 고대 동부 일본어 -N-pï '-의 쪽', 고대 류큐어 -fe '쪽'(자세한 논의는 위의 위지 속 진한어 *pæwŋ(邦)을 분석한 부분 참고) 등을 참고해볼 수 있겠다. 한국어 어원론은 가능해 보이지 않으므로, 진한 일본어 *tak pe(ŋ) '성내'(직역하면 '높은 곳')를 재구할 수 있다.
- 중세·현대 일본어와는 다르게, 고대 서부·동부 일본어의 형용사 어근은 굴절하지 않는 경우도 있었다.
*ʔip *lʌk(邑勒) '동구밖'. 성 안이 '높은 곳'이었다면 성 밖은 집으로 둘러싸인 곳이리라 자연스럽게 예측해볼 수 있겠다. 또 다시 일본어 어원론이 가능해 보인다. 두 번 문증되는 지소접미어 -ro(만엽집 권 20, 4406, 4419)가 붙은 고대 동부 일본어 iparo '집', 접미어가 없는 형태로는 세 번 문증되는 ipa '집'(만엽집 권 20, 4416, 4423, 4427)을 참고해볼 수 있겠다. 고대 서부 일본어 형태 ipê에는 접미어가 없고, 다른 고대 동부 일본어 형태들, 예컨대 딱 한 번 쓰인 낱말(hapax legomenon)인 ipi(만엽집 권 20, 4343)나 고대 동부 일본어의 특이적인 성질을 띠든 안 띠든 동부 시가에서 자주 나타나는 ipe도 마찬가지로 접미어가 붙어 있지 않다. 이 낱말은 궁극적으로는 한국어에서 차용된 말일 것으로 보이지만(< 중세 한국어 cìp '집'의 조상이 되는 고대 한국어 형태), 여기서는 어두 자음 /c-/가 소실된 일본어족 형태로 나타난다는 것이 중요하다. 이로써 진한 일본어 *ipro(k) '마을의 집'을 재구할 수 있다.
*ywij *tsiʔ *lejʔ(遺子禮) '관'과 *ʔjuh(? *jut) *kɛɨh(? *kɛɨʔ)(尉解) '저고리'에 대해서는 한국어든 일본어든 가능한 어원론을 생각해낼 수가 없다. *ka *panh(柯半) '바지'는 분명히 한국어다. 비교해볼 만한 것으로 전기 중세 한국어 *kapʌy(珂背) '바지'(계림유사 #228)가 있는데, 이는 중세 한국어 복합어 wós-kòGwòy '옷과 치마'(두시언해 권 7, 5) 안에 살아남았으며, 아마 중세 한국어 kwò[G]ùy '바지'(훈민정음 권2, 11b)와도 연관이 있을 것이다. 다만 kwò[G]ùy는 특히 모음 대응을 볼 때 한자어 袴衣 kwa-uy ~ kwo-uy에서 발전한 형태일 가능성이 더 높다. 이로써 고대 신라어 낱말 *kapan을 재구할 수 있다.
- 袴의 발음으로 :kwa와 kwò가 확인된다(훈민정음 권2, 11b).
*senʔ(洗) '신'도 명백한 한국어 어원이 있는데, 중세 한국어 sin이다. 중세 한국어 형태가 *e>*i의 상승을 거쳤다고 가정하면 고대 신라어 낱말 *sen을 재구할 수 있다.
따라서, 양서의 신라어 낱말 분석은 위지의 진한어 낱말 분석과 같은 상황에 놓여 있다. 곧, 일본어족과 한국어 낱말이 섞여 있다는 것이다. 이에는 두 가지 설명이 가능할 것이다. 먼저, 3세기에서 6세기 사이 진한과 신라 지역에는 양층언어 현상이 있었다는 것, 혹은 둘째로, 일본어족 요소가 한국어에 남긴 언어학적 흔적을 보여주고 있다는 것이다. 위지에 반영된 것과 같이 3세기에 일본어족 인칭 대명사 같은 기초 어휘가 존재한다는 것은 분명히 첫 번째 시나리오를 지지하고 있다. 하지만, 7세기 이후의 신라 고대 한국어로 된 문헌이 존재하기 때문에, 두 번째 시나리오가 양서에 반영된 상황에 잘 맞는다고 할 수 있다. 다른 말로 하자면, 일본어 화자보다 기술적으로 발달했던 고대 한국어 화자들의 당도(當到)를 기점으로 3세기에서 7세기 사이에 한반도 동남부에서 점진적인 언어 교체가 발생하였다는 것이다.
- 659년에 지어졌고 420년에서 589년의 일들을 적고 있는 남사(南史)의 신라 기사는 양서의 기록을 그대로 옮겨 적었다. 640년경에 지어졌고 581년에서 618년의 일들을 적고 있는 수서(隋書)에는 신라의 칭호들에 관해 긴 목록이 있지만 다른 단어들은 없다. 따라서, 여기서 남서와 수서의 자료는 분석하지 않았다.
이로써 한국어가 진한 지역에 뒤늦게 들어온 성공적인 침입자라는 Unger의 가설(Unger 2005)을 강하게 지지해주는, 곧 한반도 동남부에는 신라 건국에 앞서 일본어 화자들이 있었다는 것을 뒷받침해주는 위의 언어학적 증거들을 보여주었다.
번역 후기 : 기본적으로 원문의 문장 구조를 해치지 않는 범위에서 의역하려 노력했고, 그러지 않으면 뜻을 알기 힘들어지는 경우에 한해 직역 후 괄호 속 역주로 해설을 달았습니다. 그냥 의역해버리고 말까 하는 생각도 있었지만, 원문의 문장 구조와 느낌을 더 잘 살릴 수 있는 방법인 것 같아서 이 방법을 택했습니다. 번역에 관해서 궁금하시거나 조언하실 것이 있으시다면, 저자 알렉산더 보빈 교수의 이론에 관해서 궁금하신 점이 있으시다면 댓글로 달아주세요. 혹은, 보빈 교수님에게 메일로 질문을 보내신다면 빠른 시일 안에 대답을 받아보실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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