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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얀마음 언어학

Alexander Vovin(2005) - Koguryǒ and Paekche: Different Languages or Dialects of Old Korean? 번역 본문

언어학

Alexander Vovin(2005) - Koguryǒ and Paekche: Different Languages or Dialects of Old Korean? 번역

La Espero 2019. 11. 11. 18:34

앞 글에 이어 이번에는 알렉산더 보빈 교수의 Koguryǒ and Paekche: Different Languages or Dialects of Old Korean?(고구려어와 백제어는 다른 언어였는가 고대 한국어의 방언이었는가?)을 번역해 보았습니다. 앞서 올린 From Koguryǒ to T'amna에 실린 기존의 증거에 대해 더 자세한 논의를 보고 싶으시면 이 논문을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옛 한글의 입력·표시 문제로 중세 한국어는 예일식으로 표기된 로마자 원문 그대로 적었습니다. 원문은 여기서 보실 수 있습니다.

참고사항 : 문맥에 따라 원문의 Japonic은 일본어족 혹은 일본어로, Korean은 한국어족 혹은 한국어로 옮겼습니다. 이때 한국어는 물론 현대 한국어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한국어족에 속하는 당대의 언어를 말하는 것이며, 일본어는 류큐를 포함한 현대 일본에서 사용되는 언어들뿐 아니라 본고에서 주장하고 있는 바와 같이 한국어의 침입 이전 시기에 한반도에서 쓰이던 언어까지 널리 포괄하는 뜻으로서의 일본어족에 속하는 특정한 언어를 가리키는 말로 쓰입니다. 또한, 접두어 Proto-는 한국조어, 일본조어 등과 같이 원시-보다는 -조어로 옮겼습니다.

참고사항2 : 한국어는 원문에서 로마자로 표기되어 있는데, 현대 한국어 지명은 매큔-라이샤워식을, 언어자료·사료명·인명은 예일식을 따르고 있습니다. 각 표기법에 대한 정보는 위키백과 등을 참고하세요.

* 본 번역은 원저자 Alexander Vovin 교수님의 허가를 받고 게재되었습니다.


고구려어와 백제어는 다른 언어였는가 고대 한국어의 방언이었는가?

문헌과 인접 언어에서 찾은 증거

초록 : 본고는 오랫동안 계속되어 온 질문 둘, 고구려의 언어가 한국어나 일본어족과 연관이 되어 있는지와 백제에 양층언어 현상이 존재했는지를 다룬다. 이 두 질문을 고구려어와 백제어의 인접 언어인 북쪽의 만주어·여진어와 남쪽의 고대 서부 일본어에서 발견되는 차용어의 분석을 통해 새로운 관점에서 조망하고자 한다. 덧붙여 특정 문헌 증거의 재검토도 시도할 것이다. 차용어와 문헌에서 얻은 증거를 기반으로 볼 때, 삼국시대 동안 언어적 상황은 매우 동질적이었다. 다시 말해, 고구려어와 백제어는 고대 한국어의 방언이었다. 더 이른 시기에 다른 언어들이 있었을 수는 있지만, 삼국시대 동안 한반도에서 한국어 이외 다른 언어가 쓰였다는 믿을 만한 증거는 발견되지 않는다.

본고는 오랫동안 계속되어 온 질문 둘, 고구려의 언어가 한국어나 일본어족과 연관이 되어 있는지와 백제에 양층언어 현상이 존재했는지를 다룬다. 이 두 질문을 고구려어와 백제어의 인접 언어인 북쪽의 만주어·여진어와 남쪽의 고대 서부 일본어에서 발견되는 차용어의 분석을 통해 새로운 관점에서 조망하고자 한다. 덧붙여 특정 문헌 증거의 재검토도 시도할 것이다.

이 질문에 대한 최근의 연구들은 대개 삼국사기(1145년) 권 35, 36, 37의 고구려와 백제 지명에 기반을 두고 있다. 그러나 현재 더 이상 말해지고 있지 않는 언어의 계통적 소속을 결정하는 데 필요한 자료의 위계에서 지명은 가장 낮은 층위의 신뢰도를 갖는다.

  1. 실제 텍스트
  2. 인접 언어들로의 차용어
  3. 지명과 다른 고유명사

지명은 반(反)역사적이기 때문에, 차용어(특히 기록된 차용어)보다 낮은 신뢰성을 지닌다. 다시 말해, 우리는 다른 독립적인 증거 없이 어떤 언어가 개별 정치체에 이르는 지명들에만 보존되었다고 단언해서는 안 된다. 더욱이, 지명에만 의존해서는 잘못된 결론에 이를 수 있다. 키예프 러시아 시대에 대해 알 수 있는 유일한 언어학적 증거가 지명뿐이라고 생각해 보자. 그중 일부는 슬라브어일 것이고, 일부는 핀-우그르어일 것이다. 이로부터는 키예프 러시아가 슬라브어와 핀-우그르어의 양층언어 상태에 놓여 있었다고, 심지어는 키예프 러시아의 언어가 핀-우그르어였으며 슬라브어 지명은 모스크바 러시아의 침입으로 인한 새 층위로서 설명할 수 있다고 잘못 결론지을 수 있다. 이 두 가설적 해답은 분명히 오늘날 고구려어와 백제어 연구가 맞닥뜨리고 있는 몇몇 의견들을 연상시킨다.

따라서 본고에서는 다른 두 자료, 차용어와 문헌 자료에 집중할 것이다.

1. 고구려어의 일본어족적 특성 vs. 일본어와 만주어의 고대 한국어 차용어

삼국사기 권 35와 권 37에 기록된 고구려 지명은 매우 혼합되어 있다. 그중 몇몇은 일본어족처럼, 몇몇은 한국어처럼, 몇몇은 (매우 적은 수지만) 퉁구스어족처럼 보이며, 알 수 없는 언어로 되어 있는 것들도 있다. 고구려어 논쟁은 항상 일본어족적 부분에 대한 해석과 연결되어 있다. 기본적으로 말해서, 저자가 '낭만적 관점'이라 보는 것과 '실제적 관점'이라 보는 두 가지 해석이 있다. (부정적인 은유를 담으려는 것은 아니다.) 낭만적 관점에서는 고구려 지명의 일본어족적 부분은 고구려 전체 인구, 혹은 최소한 지배층은 일본어족에 속하는 언어를 말했다는 증거라고 주장한다(村山七郎 1963; 이기문 1963, 1981, Beckwith 2004 등 지면 관계상 약함). 한편 실제적 관점에서는 고구려 지명의 일본어족적 요소는 고구려 이전에 있었던 기층 언어를 보여주는 것이라고 주장한다(김방한 1983; 김주원 1993, 240-61; Janhunen 1996; 馬淵和夫 등 2000, 521-679; 송기중 1999; 이것도 지면 관계상 약함). 이 논쟁은 40년이 넘게 쉴 틈 없이 진행되어 왔으며, 어느 쪽에도 승산이 없어 보인다. 따라서, 다른 곳에서 해답을 찾아보아야 할 것이다.

고구려어의 서부·북부 인접 언어인 여진어와 만주어의 차용어 연구를 통해 그러한 해답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여진어는 12세기에서 16세기까지의 명문(銘文), 장표(章表), 사전 등을 통해 문증(文證)할 수 있고 만주어는 단지 17세기부터 문증되는 여진어의 일개 방언이지만, 다음의 두 가지 이유로 만주어 자료는 중요하게 이용된다. 첫째, 만주어는 많은 측면에서 여진어보다 의고적이다. 둘째, 여진어보다 만주어 문헌이 훨씬 많다. 여진어는 12세기 이전으로는 문증되지 않지만, 압록강과 두만강 이북의 여진 부락의 존재에 대해서는 몇 세기에 걸쳐 잘 문서화되어 있으므로, 만주는 퉁구스어족이 북쪽과 서쪽으로 퍼져나가기 전의 그들의 역사적 본향으로 보인다. 따라서, 여진족은 고구려의 직접 지배를 받았거나, 이후에는 끊임없이 접촉해왔을 것이다. 여진어와 만주어의 차용어에 대해 다루기 전에, 역사적인 영향에 대해 조금 더 생각해보는 것이 좋을 것이다.

서기 667년 고구려의 멸망 이후, 고구려의 장수였던 대조영이 686년에 발해를 세웠다. 발해는 고구려의 고토를 거의 회복했다. 발해 지배층의 언어와 민족정체성에 관해서는 논란의 여지가 있고(Janhunen 1996, 138-39, 152) 발해어에 관해 그 어떤 문헌도 남지 않았지만, 이 두 가지 이유로 고구려와 발해 지도층 사이에 모종의 문화적·언어적 연속성이 있었을 것이라 가정해야 한다. 발해어, 더 정확히는 발해 지도층의 언어가 926년 거란의 발해 정복 이전까지 200여 년 동안 여진어에 상당한 영향을 주었을 것이란 기대도 가능하다.

따라서, 여진어와 만주어에서 고구려어와 발해 지도층 언어의 영향에 의한 차용어와 구조적 영향의 흔적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라 기대할 수 있다. 낭만적 관점에 따라 이 언어가 일본어족이었다면, 여진어와 만주어에서 일본어처럼 보이는 차용어를 발견할 수 있어야 한다. 실은, 그런 거 없다. 한편, 여진어와 만주어에는 다른 퉁구스어에서는 보이지 않는, 확실히 한국어처럼 보이는 차용어들이 엄청나게 많다. 더욱이, 한국어의 영향으로 볼 수 있는 구조적 영향의 흔적도 있다. 아래에서 서술한다.

어휘

기초어휘

(1) 만주어 fulehe '뿌리' < *puleke. 여진어를 포함하여 다른 퉁구스어에서는 발견되지 않는다. 한편, 중세 한국어 pwulhwuy LH < 한국조어 *pwulukwuy를 참고해볼 수 있겠다. 만주어에 이 낱말의 이중어가 있다는 사실은 흥미롭다. fulehe 이외에 만주어에는 다른 퉁구스어들에서도 보이는 da '뿌리'가 있다. 어웡키어 daVacaan, 솔론어 dagasā, 오로촌어 daha, 울치어 daaca(n), 나나이어 daacā(Cincius 1975, 188-89), 여진어 da(Kane 1989, 206). 만주어 fulehe는 중세 한국어 pwulhwuy와 모음에서 일치하지 않는데, 해당 낱말을 중세 한국어의 조상과는 다른 방언에서 차용했을 가능성을 생각해볼 수 있다.

  • *puleke는 만주어 모음 간 -h- < *-k-, -k- < *-nk- 재구에 기반을 두고 있다(Vovin 1997).
  • 다음 약어는 중세 한국어의 성조를 나타낸다. L - 평성(Low pich), H - 거성(High pitch), R - 상성(Rising pitch)

(2) 여진어 niama '심장'(Kane 1989, 892), 만주어 niyaman은 Cincius(1975, 534)와는 달리 퉁구스 조어 *miawan과 규칙적 대응이 없어 그의 반영인 어웡키어 mewan이나 다른 비슷한 퉁구스어와 연관될 수 없다. 한편, 중세 한국어 nyem-thong LL '심장'(여기서 -thong은 신체 부위에 대한 접미어이다(Martin 1992, 811).)을 참고해볼 수 있겠다. 중세한국어 /ye/는 한국조어 *ye에도 *ya에도 대응될 수 있기 때문에(김주원 1993, 275-96), 모음에서 완벽한 일치를 얻을 수 있다.

(3) 여진어 šingun '차가운'(淸瀨義三郞 1997, 102), 만주어 singkeyen은 어웡키어 iŋii '춥다', 솔론어 inigigdi '춥다', 어원어 iŋi- '얼다, 감기에 걸리다', 네기달어 iŋi- '얼다', 오로촌어 iŋeñi '춥다', 우데게어 iŋinihi '춥다', 울치어 siŋgun '춥다', 윌타어 siŋguu- '얼다', 나나이어 siiŋgu- '감기에 걸리다'(Cincius 1975, 321)와는 여진어와 만주어에서 기대되는 어두 s-의 부재로 인해 연관되지 않는다. 한편, 전기 중세 한국어 sik-un(時根 계림유사 # 204), 중세 한국어 sik- L(sik-un의 한정형) '차가워지다' < 한국조어 *sink-/*sink-un을 참고해볼 수 있겠다.

  • 한국조어의 *-nC- 형 자음군으로부터 중세 한국어의 비연음성 모음 간 장애음 -p-, -t-, -k-, -s-의 기원에 대해서는 Vovin(2003) 참조.

(4) 만주어 biyoran '적색토 절벽', '깎아지른 듯한 사면'(Zakharov 1875, 545; Norman 1978,32; 胡增益1994, 98), '절벽'(Cincius 1975), 'hohes Ulfer aus kahler Erde(맨땅의 높은 기슭)'(Hauer 1955, 102). 이 낱말은 여진어에서는 문증되지 않는다. Cincius는 해당 낱말을 Ivanovskii의 자료에만 나타나는 솔론어 biraxan '산'과 나란히 인용하였다(Cincius 1975, 84). 만주어와 솔론어 첫 음절 모음의 불규칙 대응에 유의하라. 한편, 중세 한국어 piley LL ~ pilyey LL, 현대 한국어 벼랑을 참고해볼 수 있겠다. 최학근(1978, 101-102)에서 수집된 한국어 방언 자료들을 볼 때, 방언형들은 현대 한국어형을 지지하는 것으로 보이므로 중세 한국어 piley LL ~ pilyey LL가 현대 한국어 벼랑에 비해 더 혁신적인 형태다. 어떤 경우에도, 만주어와 중세 한국어 사이 모음 차이는 (1), (2)와 유사하다.

(5) 만주어 cecere- '짓누르다'(Norman 1978, 42) 는 다른 퉁구스어에는 대응되는 낱말이 없다. 한편, 중세 한국어 cicul- LH, 현대 한국어 지즈르-(남광수 1997, 1274)를 참고해볼 수 있겠다. 또 한 번 이 만주어 단어가 중세 한국어의 조상과는 다른 고대 한국어 방언에서 차용되었음을 알려주는 모음 차이를 확인할 수 있다. (1), (4)를 참조하라.

(6) 여진어 in '그의'(만주어 in-i '그의', 속격 형태), 만주어 i '그'(3인칭 단수 대명사)는 다른 퉁구스어에서는 확인되지 않는다. 한편, 중세 한국어 i H '이것'과 비교해볼 수 있겠다. 3인칭 대명사는 왕왕 지시사에서 유래한다는 것은 잘 알려져 있다.

(7) 여진어 se-(金启琮 1984, 252), 만주어 se- '말하다'는 다른 퉁구스어에는 대응되는 낱말이 없다. 한편, 중세 한국어 ho- ~ hoy- '하다, 말하다' < 한국조어 *hyo-를 참고해볼 수 있겠다. 현대 한국어 하-의 사역형으로서 시키- 등을 통해 알 수 있듯, 한국조어에서 */hy/ 배열은 다음 단계에서 보통 /s/가 된다. 역시 (1), (4), (5)에서 보이는 모음 차이를 확인할 수 있다.

(8) 여진어 neu'u '여동생'(Kane 1989, 268), niyohun(淸瀨義三郞 1977, 113)(만주어에는 해당하는 동계어가 없음)은 다른 퉁구스어에서는 확인되지 않는다. 한편, 중세 한국어 mwuGui LL '누이(남성의 여동생)'를 참고해볼 수 있겠다. (1), (4), (5), (7)에서 보이는 모음 차이를 다시 한 번 확인할 수 있다.

  • Kane는 만주어 non '여동생'을 동계어로 제시하지만, niyohun에서 non으로의 발달은 /ny-/ > /n-/의 탈구개음화, 모음 간 /-h-/의 소실 등 몇 가지 문제에 직면하는 것처럼 보인다. 여진어 neu'에서 만주어 non으로의 발달은 더 설명하기 힘들다.

(9) 만주어 nitan '약하다, 옅다', nitara- '약해지다' 여진어 nitara- '약하다, 옅다'는 다른 퉁구스어에서는 확인되지 않는다. 한편, 중세 한국어 nyeth- L '옅다'를 참고해볼 수 있겠. (1), (4), (5), (7), (8)에서 보이는 모음 차이를 다시 한 번 확인할 수 있다.

문화어휘

(10) 만주어 fucihi '부처' < *puciki. 중세 한국어 pwuthye LL < 고대 한국어 *pwu-tukye와 비교해볼 수 있다. 한국어 낱말은 물론 전기 중고 한어 but(佛)에서 왔다. 만주어 낱말은 두 개의 한국어적 자질을 가지고 있음에 주목하라. 곧 어두에 *b-가 아닌 무성음 *p-가 오고 한국어 접미어 *-kye를 반영하고 있다. 기초어휘 (1), (2), (4), (5), (7), (8), (9)에서 보이는 모음 차이를 또 확인할 수 있다.

  • 어떤 고대 한국어 변이형은 또한 고대 서부 일본어 potökë '부처'로도 차용되었다.

(11) 만주어 boobai '보물'(여진어에서는 확인되지 않음). 중세 한국어 pwopoy RH '보배'를 참고해볼 수 있다. 한국어 낱말의 어원인 전기 중고 한어 寶貝(paw' pajʰ)에서 만주어로 직접 차용되었을 수도 있지만, 연대적으로나 언어학적으로나 타당하지 않다(이런 경우에 *p > 만주어 /f/가 예상되며, 상성 paw'는 만주어에서 장모음으로 옮겨질 것이라 기대할 수 없다.). 또한 음성학적으로 만주어 boobai가 후기 중고 한어 puaw´ puaj`, 전기 관화 pɔwˇ puj`, 현대 표준중국어 bǎobèi로부터 오는 것은 더욱 타당하지 않다.

(12) 만주어 fatan '베틀'(Norman 1978, 84; 胡增益 1994, 260) 은 다른 퉁구스어에서는 확인되지 않는다. 한편, 중세 한국어 potoy LH '베틀'(훈몽자회 권 2 18a)을 참고해볼 수 있겠다. 만주어 형태는 *poton(-i)와 같은 형태에서 차용되었음이 분명한데, 이는 또한 다른 방언형 기원을 확인해 준다.

(13) 만주어 fisen '씨', fisike '밀' < *pisinke는 몇몇 남퉁구스어에도 차용되었다(Cincius 1977, 38). 중세 한국어 psi H(?) < 한국조어 *pVsi를 참고해볼 수 있겠다. 모음 차이와 만주어의 어말 n은 (1), (2), (4), (5), (7), (8), (9), (10), (12)에서 보이는 것과 같이 중세 한국어의 조상과는 다른 고대 국어 방언형에서 차용되었음을 알려준다.

형태론

명사 형태론

(1) 만주어·여진어와 다른 퉁구스어 사이에서 가장 눈에 띄는 차이점은 만주어·여진어에는 속격이 있고 다른 퉁구스어에는 없다는 것이다. 유형론적으로 이 특징은 몽골어족과 거란어에 모두 속격 표지가 있는 것을 보아 준 몽골어족의 영향으로도 설명할 수 있다. 그렇지만, 만주어와 여진어에서 발생한 이 격은 준 몽골어족보다는 한국어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이유는 간단하다. 만주어와 여진어에서 속격 표지의 주된 이형태는 -i이며, -ni는 -ng(만주어와 여진어 둘 다) 또는 -n(여진어만)으로 끝나는 어간 뒤에서만 나타난다. 따라서, 만주어·여진어의 -i는 준 몽골어족 속격 표지 *-n의 직접 차용이 될 수 없다. 한국어에서는 이야기가 달라진다. 중세 한국어의 속격 표지 중 하나인 -oy ~ -uy는 고대 한국어 *-o-Ci ~ *-u-Ci로 재구될 수 있는데, *-i는 속격/장소격 표지 그 자체이고, *-o- ~ *-u-는 인접한 모음에 따라 교체된다. 이는 고대 한국어 자료에서 뒷받침되는데, 이 속격/장소격 표지는 보통 矣(전기 중고 한어 hi') 자로 쓰였다. 예를 들면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다.

  • 준 몽골어족 속격 표지 -n은 거란어에서 문증된다. kuei-n '나라의'
耆郎矣皃史
ki LANG-hi CUs-i
기(파화)랑-속격 모습-주격
화랑 기파의 모습이 (찬기파랑가 5)
  • 고대 한국어와 고대 일본어 문헌에서 훈차 표기된 부분은 대문자로 적는다.
心音矣命
MOSom-hi MYENG
마음-속격 명령
마음의 명령 (도솔가 3)

(2) 다른 순수한 유형론적 특징은 전반적으로 격의 수가 줄어든 것이다. 이는 아마도 한국어의 영향 하에서 시작되어 몽골어의 영향 하에 강화되었을 것이다.

동사 형태론

(1) 만주어의 어간 교체 bi- ~ bisi- '있다'는 중세 한국어의 교체 is- ~ isi- '있다'와 닮아 있다.

(2) 만주어 한정사 -bi는 bi- '있다'의 어간으로 여겨지나(Sunik 1962, 302-22), 동사의 맨(bare) 어간이 직설법 한정형(finite indicative form)로 쓰이는 것은 이상하다. 한편, 고대 한국어 형태 -ta-pi[-ta-bi](如 '답다'로 쓰임. 중세 한국어 -taβi LH '답게, 다이' < *tap-i(taβ-R '답-'의 부사형) 참고.)를 참고해볼 수 있겠다. 예시로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다.

卵乙抱遣去如
ALH-ur AN-kwo KA-ta-pi
알-목적격 안-연결어미 가-직설법-한정형
(선화공주가) 가서 (서동을) 알처럼 안는다. (서동요 4)
  • 거의 모든 학자들 사이에서 如는 동사 어미로 쓰일 때 -ta-pi보다는 -ta로 읽는다고 합의되어 있다(小倉進平 1929; 양주동 1965; 홍기문 1956; 김완진 1980; 김선기 1993; 전규태 1994; Yu, 1996; 신채홍 2000). 한 가지 예외는 정열모(1965, 103)인데, -yo로 읽고 있다. 양쪽의 관점은 모두 잘못되었으며, 이에 대해서는 다른 곳에서 자세히 논의할 것이다.
慕人有如
KULI-NU-N SALOM-I IS-ta-pi
그리-현재-한정형 사람-주격 있-직설법-한정형
그리는 사람이 있다. (원왕생가 8)

이들로부터, 만주어와 여진어는 고구려와 발해의 영토에서 말해진 어떤 고대 한국어 방언에 어느 정도 영향을 받았음을 확인할 수 있다. 우연히도, 이 사실은 '유사 고구려어' 지명은 고구려의 언어가 아니었다는 사실을 증명함으로써 한반도의 언어학사에서 큰 의미를 갖는다. 이것은 고구려의 지배층은 고대 한국어의 특정 형태를 말했다는 사실을 강하게 시사한다. 따라서, 고대 한국어가 신라에 국한되지 않았고 3~10세기 한반도의 언어적 상황은 기존에 알려진 것보다 더욱 동질적이었다는, 거부할 수 없는 결론을 얻게 된다.

1a. 고구려 명문에서 나타나는 한국어 형태론

고구려어로 된 현존하는 문헌은 없지만, 한문으로 된 고구려 명문(銘文)에 한국어와 비슷한 어순이 발견된다는 것과(홍기문 1957, 225) 적어도 之 등 하나 이상의, 한문 문법에서는 나타나지 않는 종결어미가 발견된다는 것이(이기문 1981, 71-72; 남풍현 2000, 60-66); 배대온 2003, 410-11) 지적되어 왔다. SOV 어순은 고구려어의 계통을 결정하는 데 큰 도움을 주지 않지만, 형태론은 조짐이 좋아 보인다. 예시들을 살펴보자. 첫 번째로는 유명한 광개토대왕릉비의 마지막 줄에서 나타난다.

買人制令守墓之
산 사람은 무덤을 지키게 한다. (광개토대왕릉비 11.9)
  • 호흥식(1984)에서 인용. 첫 숫자는 쪽수를, 둘째 숫자는 줄 번호를 가리킨다.

어조사 之는 여기서 한문에서처럼 '그것'으로 해석될 수 없다. 이 경우에는 사역동사 令 뒤에서 買人制令之守墓처럼 쓰여야 한다. 다음에서 보일 평양성의 명문에서도 마찬가지로, 之가 자동사 '가다' 뒤에서 쓰인다.

自此西北行涉/步(?)之
여기서 서북쪽까지 (건너)간다. (고구려 평양성 벽문 #1, 9.2-3)
  • 朝鮮金石總覽(朝鮮總督府 1920, 8-9)에서 인용. 호흥식(1984)에는 나오지 않는다.

같은 어미 之가 신라 명문에서도 발견된다는 사실은 흥미롭다. 배대온은 그것을 종결어미로 정의하고, 나아가 성주 석불명(967년)에서 마지막으로 보인다고 언급했으며, 이 ‘소멸’을 음성 변화로 결론지었다(배대온 2003, 410-11). 이 고대 한국어 종결 어미의 명백한 동계어는 반드시 존재할 것이고, 중국어 역사음운론과 전기 중고 한어에서 첫 자음의 분포에서 보이는 간격을 고려한다면 찾을 수 있을 것이다. 之 자는 전기 중고 한어로 /tsyi/라 읽혔다. 전기 중고 한어에는 *ti, *thi, *di라는 음절이 없었으며, 말음 /i/는 오직 권설음 tr-, trh-, dr- 혹은 파찰음 ts-, tsh-, dz-, tsy-, tsyh-, dzy-와만 결합할 수 있었다. 따라서 고대 한국어 *ti에 대한 /tsyi/의 선택은 아주 자연스러웠고, 이를 통해 잠정적인 중세 한국어 동사 표지 -ti와 함께 고대 한국어 之 /ti/를 쉽게 확인할 수 있다. 일본어족에는 가능한 동계어가 없으므로, 다시 한 번 고구려어가 고대 한국어의 방언이라는 결론에 이른다.

고구려 명문이 하나 더 있는데, 한문 기반으로는 설명되지 않는 다른 접사가 발견된다.

麻錦之衣服建立處伊者賜之
매금의 옷을 모신 곳에서 이것을 주었다. (고구려 중원 비문 15.11-12)
  • 호흥식(1984)에서 인용.

여기서 伊는 고대 한국어 주격(능격?) 표지 -i로 해석될 수 있을 것이다. 주격 표지 -i는 고대 서부 일본어에도 있었지만, (중앙 일본어의 후기형태들을 포함하여) 다른 일본어족 언어들에서는 발견되지 않으므로, 이를 고대 한국어에서 고대 서부 일본어로 차용된 낱말 후보로 올릴 수 있을 것이다(Vovin 2004, 2006).

  • 향찰과 이두에서 伊의 소릿값은 /i/이다. 향찰과 이두에서도 伊가 주격 조사로서 /i/ 소리를 내는 경우가 있는데, 佛伊 /PWUT[U]KYE-i/ '부처가’(수희공덕가 3), 身伊 /MWOM-i/ '몸이’(보개회향가 10) 등을 예로 들 수 있다.

곧, 종결어미 之에 더해, 고구려 명문에서 추가적으로 伊라는 형태론 표지를 확인하는 것이 가능하며, 빈약한 고구려 명문 자료 속에서 숨어 있는 몇몇 고대 한국어 변이형을 발견할 수 있었다.

2. 백제의 '양층언어 현상'과 고대 서부 일본어 속의 백제어

백제에는 언어가 두 개 있었다는 것이 이 분야의 주류 의견인 것처럼 보인다. 곧, 부여(夫餘)계의 “귀족” 백제어와 토착어인 한(韓)계 “평민” 백제어가 있었다는 것이다. 이 믿음에 대한 증거로는 대개 다음과 같은 주서(周書)의 기록이 인용된다.

王姓夫餘氏號於羅瑕民呼爲鞬吉支夏言竝王也妻號於陸夏言妃也
왕은 부여씨다. 귀족들은 (그를) 於羅瑕라 부르고, 백성들은 鞬吉支라 부른다. 한어(漢語)로는 둘 다 왕이라는 뜻이다. (그의) 아내는 於陸이라 불리는데, 한어로는 왕비라는 뜻이다. (주서 권 49, 886)
  • 중화서국 판본(中华书局, 1971)에 따라 인용됨. 권수 뒤의 숫자는 쪽을 의미한다.
  • 같은 구절이 북사(北史)에서도 발견된다. (북사 권 94, 11a; 건륭제 때 개정된 판본(1740년)에 따름)

이 구절에서 왕이 귀족들에게서는 於羅瑕로, 백성들에게서는 鞬吉支로 불렸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것이 백제에서의 양층언어 현상의 존재에 대한 증거가 될 수 있겠다고 처음 추측한 것은 고노 로쿠로(河野六郞)였는데, 그는 단어 하나에 기반을 두고 양층언어 현상이 있었다고 주장하는 것에 내재된 위험을 지적했지만, 곧 추가적인 논의를 통해 이 관점을 뒷받침하려 했다(河野六郞 1987, 78ff).

이런 종류의 주장은 너무나도 약하다. 예컨대, 고대 서부 일본어에는 왕을 이르는 칭호가 여럿 있었는데, 그 중 가장 많이 쓰인 두 개로는 문헌에 기대어 결론지은 것에 따르면 오직 귀족들에게서만 쓰인 것으로 보이는 opo-kîmî ‘위대한 왕’과, 귀족과 백성 모두에게서 쓰인 mî-kaNtô ‘고결한 문’이 있다. 고대 서부 일본어와 중고 일본어가 고대 한국어와 마찬가지로 문헌에 거의 남지 못했다는 가설적인 상황을 상상해 보자. 그렇지만 중국에서 온, 필명이 臭山翁인 사람이 한 명 있어 8세기 초반의 일본에 대한 다음과 같은 기술을 남겼다고 하자.

*公卿謂王號於布几眉民呼爲眉加途
*귀족들은 왕을 於布几眉라 부르고, 백성들은 眉加途라 부른다.

따라서, 우리는 전기 중고 한어 於布几眉 /epokimi/와 眉加途 /mikado/가 고대 일본의 ‘양층언어 현상’에 대한 증거가 된다고 주장할 멋진 기회를 얻게 될 것이다.

백제어는 고대 서부 일본어 문헌에 많은 어휘항목을 남겼기에 어떤 의미로 고구려어보다 운이 좋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구려어와 비슷하게 백제어 연구의 주된 부분은 가장 최근 논문인 도수희(2005) 등에서 보이는 것처럼 지명 분석에 집중되어 있다. 예외적으로, 고노 로쿠로(河野六郞 1987)와 John Bentley(2000)에서는 ― 후자에서는 부분적으로 지명도 함께 다루고 있긴 하지만 ― 반갑게도 고대 일본어로 기록된 백제어 낱말을 직접적으로 다루고 있다. 백제에서의 양층언어 현상의 증명이라는 고노의 중심 목표와는 다르게, 그리고 퉁구스어와의 동계어를 찾으려는 Bentley의 노력과는 다르게, 내 목표는 용어 그대로 어휘적 증거를 수립하고, 이 단어들로부터 백제어가 한국어였는지, 일본어족이었는지, 퉁구스어족이었는지 밝혀낼 수 있는가를 보는 것이다. 백제어 낱말의 주된 원전은 일본서기(720년)인데, 우리가 알고 있는 백제어 대부분이 보존되어 있다. 어떤 이는 백제 지명의 많은 부분에서 백제어 낱말을 찾을 수 있다는 사실에 기반을 두고, 삼국사기의 백제 지명에 우대권을 주어야 한다는, 본 주장에 대한 합리적인 반대 의견을 낼 수 있다. 하지만, 두 가지 중대한 논거가 있다. 먼저, 고대 일본어로 기록된 백제어 낱말들은 외국어로 되어 있다. 고훈과 아스카 시대의 일본에서 한반도의 사멸했거나 사멸 위기에 처한 언어로 된 지명을 공부하고 해설하는 언어 문서화 계획에 관심을 가졌을 것 같지는 않다. 둘째로, 일본서기 텍스트에는 백제어에 속하는 것으로 보이는 낱말에 대해 설명하는 주석이 있다. 따라서, 이 낱말들이 진정으로 백제어에 속한다는 문헌학적 증거를 갖게 되었다. 더욱이, 이 단어 중 몇몇은 아래에서 설명할 것과 같이 고대 서부 일본어에 차용되었다. 이들을 고대 한국어의 어떤 방언에서 차용된 말로 간주할 수 있는 세 가지 이유가 있다. a) 거의 (일본어족에서 고대 한국어와 직접적으로 접촉한 유일한 분지(分枝)인) 고대 서부 일본어에서만 문증되며, 고대 동부 일본어에서는 거의 나타나지 않고, 류큐어에서는 사실상 나타나지 않는다. b) 일본어족에서 전반적으로 발견되는 의미론적 이중어가 있다. c) 상당히 간단한 고대·중세 한국어 어원을 갖는다(Vovin 2004). 백제가 양층언어적이었다는 주장이 자료를 통해 어떻게 반박되는지 보자. 자료에 접근하기에 앞서, 독자들에게 경고할 것이 하나 있다. 본고에서는 삼국사기에 기록된 지명들을 배제하였는데, 이는 본고의 서론에서 이미 제시한 이유 때문이다. 또한 고대 일본어 문헌에서 발견되는 백제어 낱말이라 하더라도, 음성적 전달 과정이 의심스럽거나 어떤 어족에 속하는 낱말인지 즉시 확인할 수 없는 경우에는 모두 배제하였다. 따라서 Bentley가 논의한 총 81개의 백제어 낱말 가운데(Bentley 2000, 426-38) 지명에 기반한 39개와 분할·식별·기록에서 혹은 음운론적으로 문제가 있는 24개를 제외한, 믿을 만하게 문증되고 명백히 분석에 이용할 수 있을 만한 18개의 낱말만을 목록에 올렸다.

(1) 鞬吉支(전기 중고 한어 kjən-kjit-tsje) ‘왕’은 백제의 백성들이 왕을 불렀던 이름으로, 위에서 인용한 주서에 따른 것이다. 이 단어는 백제왕들의 이름에서도 보이는데, 일본서기 가타카나 표기에서 百濟王 [KuNtara-nö] kokishi(コキシ) ‘구다라의 왕’(일본서기 권 9, 260, 263; 권 10, 276; 권 14, 377; 권 17, 23, 26; 권 19, 75, 77, 83; 권 20, 109) 혹은 伽羅(가야; Kara)/任那(임나; Mimana)의 왕(일본서기 권 6. 176)에 대한 명칭으로 등장한다. 더 흥미로운 것은, 고구려의 왕에 대해서도 두 번 사용되었다(일본서기 권 10, 282; 권 20, 104). 변이형 konikishi(コニキシ, 昆キシ)도 보이는데, 백제왕을 가리킬 때뿐 아니라(일본서기 권 9, 257; 권 11, 310; 권 14, 377; 권 24, 190, 197) 고구려왕을 가리킬 때도 있다(일본서기 권 14, 387). 두 가지 타당한 질문이 떠오른다. a) 일본어는 왜 백제 백성들의 언어에서 단어를 빌려왔는가? b) 고노 로쿠로(河野六郞, 1987, 78ff) 등의 기존 주장대로 그것이 정말 토착의 한어에 속한다면, 왜 그것이 한어가 쓰이지 않았던 고구려의 왕에게도 쓰이는가? 낭만적 관점에 따르자면 일본어는 백성 백제어보다는 ‘귀족’ 백제어에서 낱말들을 빌려왔을 것이다.

  • 鞬吉支의 마지막 글자 支는 상고 한어 발음 *kje의 반영으로서 고대 한국어와 고대 일본어에서 주로 *ki로 읽히지만, 지금은 중국의 한문 전사 자료를 다루고 있기 때문에 상고 한어의 소릿값을 갖는다고 가정해야 한다.
  • 일본서기는 国史大系(黒板勝美 1971)판에 기반하여 인용하였으며, 권 및 쪽 수도 国史大系판에 따랐다.

(2) ‘귀족’ 백제어의 왕호 於羅瑕(전기 중고 한어 ʔjə-la-ɣæ)에도 주목해 보자. 이 명칭에 따른 백제어 낱말도 orikoke(オリコケ)라는, 약간 변질된 형태로 일본서기에 기록되어 있다(일본서기 권 19, 72). 더욱이, 이 백제어 낱말을 보여주는 고대 서부 일본어의 차용어도 있다. 오마다카 등에 따르면 고대 서부 일본어에는 ira-tu kô와 ira-tu mê의 두 낱말이 있었는데, 이는 각각 남자와 여자에 대한 경칭이었다(時代別国語大辞典 105).

  • 고노는 일본서기에서 나타나는 고구려의 왕호 worikokisi(ヲリコキシ)(일본서기 권 19, 긴메이-7)가 orikoke와 kokisi의 혼효를 보여준다고 믿었다(河野六郞 1987, 80). 저자는 해당 출처에서 worikokisi를 찾을 수 없었지만, orikoke와 worikoke를 고구려의 왕과 왕자에 대한 명칭으로 사용하고 있는 백제본기(百濟本記)의 인용문이 있었다(일본서기 권 19, 73).
藤原伊良豆賣乎波婆婆止奈母念
Puntipara ira-tu mê-woNpa papa tö namö omöp-u
후지와라 귀족(?)-속격/장소격 여성-대격(강조) 엄마 생각하다-한정형
후지와라의 그 귀족 여성을 엄마로 생각하였다. (宣命 25)

둘 다 일종의 칭호였지만 위와 같은 문헌에서의 쓰임에 기반하여 볼 때, 여기서 가장 흥미로운 문제점은 ira-의 의미다. 칭호의 나머지 부분은 명백하다. -tu는 속격/장소격 표지고 mê ‘여성’과 kô (이 경우) ‘남성’은 성별 표지로, 일본어족에서 완벽하게 문증된다. 한편 ira-는 일본어족에서 찾은 내적 증거에 기반을 두고서는 설명할 수 없으며, 다른 어떤 일본어족 분지에서도 귀족에 대한 명칭으로서 나타나지 않는다. 고대 서부 일본어는 일본 조어 *e가 /i/로 일관되게 상승한 유일한 분지이므로(Thorpe 1983; Serafim 1985; Miyake 2003; Frellesvig and Whitman 2004), 선(pre)-고대 서부 일본어 형태 *era-와 *ira-를 모두 제안해볼 수 있다. 於羅瑕(전기 중고 한어 ʔjə-la-ɣæ)에 기반을 두고 추정할 수 있는 백제어 *eraGa ‘왕’은 일본어족에서 예상되는 -G- > -∅-의 변화를 통해 잠정적인 선-고대 서부 일본어 *era-에 정확히 들어맞는다. 고대 서부 일본어 ira-는 분명히 차용어이며, 다른 일본어족 분지에서는 확인되지 않는다. 시간이 지나면서 칭호가 ‘강등되는’ 것은 역사를 통해 잘 알려져 있다. 예를 들면, 고대 서부 일본어 kîmî ‘주군’이 현대 일본어에서는 kîmî 친근한 2인칭 대명사가 된 것이나, 고대 한국어 nilim ‘주군, 지배자’이 현대 한국어 님이 되어 존칭 접미사 혹은 (시적 표현으로) 사랑하는 사람이란 뜻으로 쓰이는 것, 흉노어 *drang-ga ‘황제’가 몽골어 daruGa ‘추장, 지배자’가 된 것 등이 있다.

  • 고대 서부 일본어 -tu도 비슷하게 고대 한국어 속격 표지 叱 /cɨ/에서 차용된 것이다(Vovin 2006).
  • 근·현대 일본어 era ‘위대한’과 동계어로 볼 수도 있다. era-는 다른 방언으로 퍼져나간 중심지인 간토 지방에서 처음 문증된다(馬淵和夫·佐伯梅友(1969), “古語辞典”, 148; 前田勇 1990, 149). 간토 지방은 이따금 일본조어의 중모음(mid vowel)을 보존하고 있는 것이 알려져 있기에(현대 일본어 sugos- ‘통과하다’와 고대 서부 일본어 및 중세 일본어 sugus- 참고), 이 낱말에서 어두 /e/의 다른 증거를 찾는 것이 가능하다.

(3) 위에서 언급한 대로 주서에 기록된, 왕비를 가리키던 백제 ‘귀족어’ 낱말 *oluk(於陸)은 일본서기에서 백제의 왕비에 대한 칭호로 기록된 koni-woruku(コニヲルク) ‘위대한 왕비’에 의해 뒷받침된다(일본서기 권 26, 269). 고노(河野六郞, 1987, 80)는 고구려의 왕비에 대해 woriku(ヲルク)라는 명칭이 있었음에 주목한다(일본서기 권 21, 130). 또한, 고구려의 왕비에 대한 명칭으로 orike(オリケ)와 worikuku(ヲリクク)도 있다(일본서기 권 29. 73). 따라서, 그 고구려어 단어에 대한 그의 질문이 맞다면, 이것은 ‘부여어’ 낱말일 것이란 쪽으로 생각이 기울 것이다. 하지만 이것이 ‘부여어’가 일본어족이라는 것을 증명해 주는가? 매우 명백하게도, 일본어족 어원은 가능하지 않다. 한편으로, 한국어의 내적 어원론은 그럴 듯해 보인다. 먼저, 일본어 전사 자료에서 u~i의 변이에 주의하자. 이는 일본어로는 표현될 수 없는 다른 모음이 있었음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 둘째로, 중세 한국어 wòló- ~ wòlG- ‘오르다’를 참고하면, 한국조어 *wòlók-을 재구해볼 수 있다. 가능한 어원은 이때 *wol(G)-ok ‘높은 사람’이다.

(4) 주서에는 백제 ‘백성’들이 ‘여왕’을 가리킬 때 쓴 낱말이 기록되어 있지 않지만, 고노는 일본서기의 주석을 기반으로 여왕을 가리키던 다른 낱말로 pasikasi(ハシカシ)가 있음을(일본서기 권 14, 362; 권 26, 273) 설득력 있게 논증했다(河野六郞 1987, 81). 고노는 이것이 틀림없이 ‘백성’들의 언어에 속할 것이라고 결론지었지만, 한편으로는 임시방편적인 것이다. 그의 논리에 따르면 이 낱말은 백성들의 말에서 왔으므로 이 낱말에 대한 어떤 한국어 어원론을 찾을 수 있을 것이지만, 사실은 명백히 그렇지 않았다.

(5) 고노는 낱말을 더 가져와 백제에서의 양층언어 현상에 대한 증거로 삼고 있다. 가져온 낱말은 둘인데, sasi(サシ)(일본서기 권 10, 277; 권 14, 388)와 kï(キ, 基)(일본서기 권 19, 59, 93)인데, 둘 다 ‘성’이라는 뜻이다. 어느 쪽이 ‘귀족’ 백제어고 어느 쪽이 백성 백제어인지 증거가 없지만, 어원론은 고노의 양층언어 가설에 힘을 실어주고 있다. 고노가 옳게 언급한 것처럼, 백제어 sasi는 중세 한국어 cás ‘성’을 통해, kï는 고대 서부 일본어 kï ‘성’을 통해 명확히 확인된다. 그러나 두 가지 문제가 있다. 첫 번째로, kï는 백제어에서 일본어로 차용된 낱말이라는 것이다 ― 이것을 숨기지 않은 고노에게 찬사를 바친다. 또 다른 차원의 문제도 있다. 같은 단어가 고구려 지명에서 *xuət ‘성’으로(Beckwith(2003, 57)에 따르면 *xuər) 나타난다는 것이다. 이 단어에는 특별히 일본어족적인 것이 없는데, 몽골어 qoto(n), 만주어 xecen ‘도시’, 아이누어 kotan ‘마을’ 등을 참고할 때 내륙아시아와 동아시아의 유명한 반더보르트(Wanderwort; 여러 언어권에 차용되어 널리 퍼지게 된 단어 - 역주)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백제어 *casi는 고유어처럼 보이는 반면, kï는 궁극적으로는 내륙아시아에서 온 차용어로, 고대 서부 일본어에 차용되었을 것이다. 두 번째 문제는 sasi가 고구려의 성을 가리키는 데도 쓰였다는 것이다.

  • 고노는 분명히 가타카나의 용법에 근거를 두고 基를 /ki/로 적었다(河野六郞 1987, 82). 한편 Bentley는 이 낱말을 (/ï/가 더 적합한 표기이긴 하지만) 올바르게 *kɨ로 전사했다(Bentley 2000, 425). 불행하게도, Bentley는 인용한 백제어 단어의 일본서기 속 출처를 기재하지 않아, 만요가나 基가 백제어 *kï ‘성’을 적는 데 쓰였다는 증거를 일본서기에서 찾을 수 없었다. 만요가나 基는 삼국사기에서 백제어로 성을 쓰는 데 쓰였으며(삼국사기 권 36, 4a), 고대 서부 일본어 kï ‘성’에서 볼 때 /ï/ 모음을 확인할 수 있다.

따라서, 고노가 내세운 양층언어 현상의 증거는 불분명해졌다. 먼저, 칭호에 대한 이중어가 두 가지 다른 언어에 속하는지 확신을 갖고 결론지을 수는 없다. 정반대로, 두 낱말은 아마도 같은 언어에 속했을 것이다. 둘째로, ‘성’에 대한 이중어도, 그 중 하나가 해당 지역의 보편적인 반더보르트란 것이 밝혀졌기 때문에, 양층언어 현상을 나타내어 주지는 않는다. 백제에 일본어족 형태의 특정한 귀족 언어가 존재했을 가능성은 일본서기에 보존된 다른 백제어 어휘를 보면 더욱 낮아진다.

  • 이 어휘 목록은 Bentley(2000, 424-28)에서 먼저 연구되었지만, Bentley의 관점은 백제어가 원래 퉁구스어족이었다는 것이었으므로(Bentley 2000, 424), 그의 어원론은 재고의 여지가 있다.

(6) 백제어 arosi, arusi(アロシ, アルシ, 阿留之) ‘아래’(일본서기 권 14, 388; 권 17, 17, 26; 권 19, 52, 54, 59, 60, 63, 68). 중세 한국어 àlá, àláy(< *àlá-áy)와 분명하게 연관되어 있다. 백제어의 -si는 설명을 필요로 하지만, 고노나 Bentley는 그 부분에 대해 설명하지 않는다. 이 -si는 일본서기에서 확인되는 백제어 방위어 세 개, arosi/arusi ‘아래’, okosi/ukosi ‘북쪽’, aripisi ‘남쪽’에서 모두 발견된다는 것을 분명하게 볼 수 있다. 혹자는 이 분포를 볼 때 -si가 백제어의 방위 접사라고 말하고 싶어질 것이다. 그렇지만 텍스트에서 이 낱말들의 사용례를 확인해 본다면, 더 간단한 설명을 찾을 수 있다. 이들은 모두 후행 명사 앞에서 나타난다. 다시 말해, 이들은 수식어 자리에서 발견된다. 곧, 이 -si는 분명히 고대 한국어 속격 표지 -cï(叱), 중세 한국어 속격 표지 -s와 동계어이고, 세 방위어를 aro-si/aru-si ‘아래의’, oko-si/uko-si ‘북쪽의’, aripi-si ‘남쪽의’로 재분석해볼 수 있겠다. 이를 통해서, 어휘뿐만 아니라 형태론에서도 백제어의 한국어적 특성에 대한 증거를 찾을 수 있다.

  • 일본서기와 속일본기(796년)의 몇몇 백제어 낱말들은 만요가나가 아니라 텍스트 행간의 가타카나 전사로서만 남아 있다. 아래부터는 괄호 속에 가타카나나 만요가나 둘 중 하나만 기재되어 있는 낱말도 있을 것이다.
  • 우연히도, 고대 한국어 叱 /cï/은 일본서기에서 /si/로 전사된다(일본서기 권 17, 29).

(7) 백제어 okosi, ukosi(オコシ, ヲコシ, ウコヲシ) ‘위, 북쪽’(일본서기 권 17, 17; 권 19, 52, 54, 68;). Bentley는 이 단어를 고대 [서부] 일본어 okös- ‘일어나다’와 비교했는데(Bentley 2000, 425), 음성학적으로는 잘 맞지만, 의미론적 측면에서의 비교는 의심스럽고, (6)에서 언급된 형태·통사론적 용례를 볼 때 완전히 맞지 않는다. 고노(河野六郞 1987, 77)와 Bentley도 언급한 것처럼, 중세 한국어 wuh L ‘위’야말로 명백한 동계어다. 중세 한국어 wuh L ‘위’는 첫 음절이 평성인 아주 희귀한 단음절 명사기 때문에, 가장 그럴 듯한 재구는 한국조어 *wuku LH/LL일 것이다. 백제어 oko-si ‘북쪽의’는 고대 서부 일본어 kôsi ‘북쪽’으로 차용된 것으로 보인다. 몇 가지 예를 들면 다음과 같다.

보통 고대 서부 일본어 kôsi는 kôs- ‘건너다’에서 유래한 것으로 여겨진다(土橋寬 1957, 34; 澤瀉久孝(1967), “時代別国語大辞典”, 293). 그렇지만, 사실 고대 서부 일본어 kôsi는 고대 서부 일본어 문헌에서 역사적인 호쿠리쿠도(北陸道)를 가리키는 지리학적 용어로 사용되었는데, 와카사(若狭), 에치젠(越前), 카가(加賀), 노토(能登), 에추(越中), 사도(佐渡), 에치고(越後)와 같은 국(구니; 国)들을 포함한다. 이후의 문헌들에서 동사 kôs- ‘건너다’를 쓰는 데 사용된 越 자가 일곱 개 중 세 개의 국에 들어 있지만, 그것이 고대 서부 일본어 kôsi ‘북쪽’과 의미론적 접점이 있는지는 의심스러운데, 두 가지 이유가 있다. 먼저, 야마토 평야에서 북쪽뿐 아니라 어느 방향으로 가든 산을 넘어야 한다. 둘째로, 호쿠리쿠도는 야마토에서 정확히는 북쪽과 동북쪽 사이에 위치한다.

登富登富斯 故志能久迩迩 佐加志賣遠 阿理登岐加志弖
töpö-töpö-si // kôsi-nö kuni-ni // sakasi mê-wo // ar-i tö kîk-as-i-te
멀다-멀다-종지형 // 북쪽-속격 국-장소격 // 현명한 여자-대격 // 나가다-종지형 불완전동사 듣다-존칭-부정형-연결형
머나먼 북쪽 국에 현명한 여자가 산다고 들었다. (고사기 가요 2)
之奈射可流 故之能吉美良等 可久之許曾 楊奈疑可豆良枳 多努之久安蘇婆米
sina-N-sakar-u // kôsi-nö kîmî-ra-tö // ka-ku si kösö // YAnaNkî kaNturakî // tanôsi-ku asôNp-am-ë
(해-장소격-떨어지다-한정형) // 북쪽-속격 님-복수-수반격 // 따라서-부정형 접사 접사 // 버드나무 가발 // 기쁘다-부정형 // 즐기다-잠정형-증거형
해로부터 멀리 떨어진 북쪽의 님과 함께 버드나무 (가지로 만든) 가발을 (쓰고 잔치를) 즐기고 싶다. (만엽집 권 18, 4071)
  • sinaNsakaru를 kôsi에 적용되는 마쿠라코토바(枕詞; 일본어 와카에 사용되는 수식어 그룹의 일종으로, 특정한 단어 앞에 붙어서 그 의미를 강조하거나, 정서를 환기시키거나, 어조를 고르게 하는 기능을 한다. - 역주, Wikipedia에서 인용)로 해석한 것이다. 마쿠라코토바의 sina를 ‘해’로 해석한 것에 대해서는 村山七郎(1970)를 참고하라. 이것은 ‘산비탈’로 해석하는 일반적인 관점과는 반대되지만(高木市之助 등 1962.4, 268), 저자는 여러 곳에서 고대 서부 일본어 sina ‘산비탈’은 존재하지 않는 유령이라는 사실을 언급했다.

고대 서부 일본어 kôsi ‘북쪽’은 고대 동부 일본어와 류큐어에서는 대응되는 어떤 낱말도 없다. 이러한 제한적인 분포는 그것이 고유어가 아니라는 사실을 짚어준다. 따라서, 우리가 여기서 다루었던 낱말은 백제어 okosi로부터의 차용어라고 할 수 있다.

(8) 백제어 aripisi(アリヒシ, 阿利比志) ‘남쪽’(일본사기 권 9 260; 권 17, 24; 권 19, 55). 이 낱말은 Bentley(2000, 427)에서 지적한 바와 같이 분명히 중세 한국어 alph L과 동계어이다. 앞에서 말한 것처럼, 일반적이지 않은 평성의 단음절어를 통해 한국조어 *alphH LH/LL을 재구할 수 있다. (6)과 (7)에서 말한 것과 같이, aripi-si의 -si는 속격 표지이며, 따라서 aripisi-si ‘남쪽의’로 분석해야 한다.

(9) 백제어 kumu, komu, kuma(クム, クマ. コム, 久麻) ‘곰’(일본서기 권 14, 388; 권 17, 28)는 표면적으로 고대 서부 일본어 kuma와 닮았지만, 상성을 갖는 중세 한국어 kwom R ‘곰’이 이전의 이음절 구조가 한국조어 *kwomo ‘곰’을 가리킨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 이것은 잠정적인 한국-일본어족의 동계어로서 널리 받아들여지는 몇 안 되는 낱말들 중 하나다. 그렇지만, 네 가지 백제어 형태 중 셋에서 고대 서부 일본어 kuma처럼 *o가 /u/로 상승하는 것이 보이는데, 이는 중세 한국어 mwolwo LH와 mwoy R ‘산’(아래 (12) 참조)과 비교해 볼 때 백제어 mure ‘산’(고대 서부 일본어 mure ‘산’으로 차용)에서도 확인된다. 이는 두 가지 선택지를 남긴다. 곧 고대 서부 일본어 kuma가 백제어에서 차용된 것이라 간주하든지, 혹은 한국어와 일본어족의 계통적 관계를 주장하고 싶다면 백제어와 고대 서부 일본어에서 같은 변화가 독립적으로 일어났다고 주장하든지 선택해야 한다. 더욱이, 고대 서부 일본어에서 모든 중설모음의 상승(*o > /u/, *e > /i/)이 일어난 반면, 백제어에서는 고대 서부 일본어 sima ‘섬’에 대비되는 형태인 syema ‘섬’과 nyerim ‘주인’(아래 (14), (19) 참조)과 같이 *e > /i/가 일어나지 않았다. 따라서, 차용어로 간주하는 해법이 더 간단하고 명쾌해 보인다. Bentley는 만주어 kûwa-tiki ‘새끼곰’ 및 kûwa-tiri ‘곰같은 동물’과 비교하였는데(Bentley 2000, 425), 만주어 역사음운론적 관점에서 볼 때 완전히 비현실적인 형태이다.

(10) 백제어 kuti(俱知) ‘매’(일본서기 권 11, 311). Bentley는 화명류최초(和名類聚抄; 권 18, 1b)에서 보이듯 이 단어가 잠깐 고대 서부 일본어와 전기 중고 일본어에 차용되었음을 바로 짚었으며, 화명류최초도 이 단어가 백제어에서 온 것임을 확인해주고 있다. 만주어 heturhen ‘작은 매’(Bentley 2000, 426)와의 비교는 모음의 규칙적 대응이 존재하지 않고, 만주어 형태에서 형태론적으로 설명되지 않아 기각되어야 한다.

(11) 백제어 nare, nari(ナレ, ナリ)(일본서기 권 17, 28, 29; 권 14, 38); (那禮)(일본서기 권 9, 247) ‘개울’. Bentley는 이 단어를 중세 한국어 nayh R ‘내’와 맞게 비교했으며, 삼국사기의 전사자료 那利도 함께 언급했지만(Bentley 2000, 427), 출처를 잘못 달았다. 이 전사는 삼국사기 색인에도(백낙준 1956) 고대 국어 어휘 표기 한자의 자별 용례 연구에도(송기중 2004) 나오지 않기 때문에, 이것이 진짜 백제어에 속하는 것인지 판별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중세 한국어 nayh R < *naCih LH와의 비교는 찬기파랑가에서 확인되는 고대 한국어 NAli(川理) ‘강’에 의해 강화되는데, NAli의 둘째 음절은 /li/로 음차표기된 것이다. Bentley는 이외에 퉁구스어, 예컨대 만주어 niyari ‘늪’, 어웡키어 ña:rut ‘호수’, 어원어 ñarika ‘늪’ 등과 비교하였는데(Bentley 2000m, 427), 이는 의미론적·음성학적·형태론적인 이유로 기각되어야 한다.

  • Bentley가 오타를 냈을 가능성도 있다. 백제 지명 乃利阿縣에서 乃利는 백제어 nari ‘강’을 적은 것으로 보인다(도수희 2005, 57). 그러나, 삼국사기에서 乃利阿縣이 나오는 부분에서(삼국사기 권 36, 6b; 권 37, 9a) 乃利는 ‘강’과는 아무 관련이 없다. 또는, Bentley가 삼국사기가 아닌 일본서기를 의도한 것일지도 모르는데, 백제 지명 久麻那利에서(일본서기 권 14, 388) 那利가 발견되는 한편으로 熊川에서 川은 훈차표기된 것인데 가타카나로 nare라 적혀 있다(일본서기 권 17, 29).

(12) 백제어 mure(ムレ)(일본서기 권 9, 262; 권 19, 92), mura, mora(ムラ, モラ)(일본서기 권 15, 412) ‘산’. Bentley는 이 단어를 중세 한국어 mwolwo LH와 올바르게 비교했지만, ‘산’이라는 옳은 뜻 외에 ‘산등성이’라고 잘못 해석했다(Bentley 2000, 426). 이 단어에는 ‘산등성이’라는 뜻은 없으며, 애초 용비어천가의 주해(권 4, 21b)에서만 확인되는, ‘산’이라는 뜻으로 딱 한 번만 쓰인 낱말(hapax legomenon)이다. 그렇지만 이 딱 한 번만 쓰인 낱말은 중세 한국어 문헌들을 통해 충분히 확인되는 mwoy R ‘산’에 의해 뒷받침된다. 백제어 mure ‘산’은 고대 서부 일본어 mure로 차용되는데, 이는 지명뿐 아니라 고대 서부 일본어 시에서도 나타난다. 류큐어와 고대 동부 일본어에서는 발견되지 않으므로, 차용어일 수밖에 없다. Bentley는 추가적으로 퉁구스조어 *mulu ‘산등성이’도 함께 제시했는데, 이는 잘못 재구된 것이다. *mulu ‘산등성이’는 네기달어 mulu ‘천장을 받치는 가로 기둥’, 나나이어 mulu ‘용마루’, 만주어 mulu ‘산마루, 용마루, (짐승과 새들의) 척추’(Cincius 1975, 555)에서 재구된 것인데, 먼저, Bentley의 재구는 음성학적으로 부정확한데, 나나이어의 /u/는 퉁구스조어에서 *ï가 되므로 *mïli를 얻을 수 있지만 이는 한국조어 *wo와 모음이 대응되지 않는다. 둘째로, Bentley가 “퉁구스어 형태는 원래 상당히 높은 곳에 있는 것을 가리켰을 것으로 보인다.”(Bentley 2000, 426)고 한 것은 자료를 통해 충분히 뒷받침되지 못한다. 따라서, 이 퉁구스어 어원론은 묵살되어야 한다.

  • Bentley는 이 낱말이 일본서기에서 武禮라는 만요가나로 적혀 있는 것도 확인했지만(Bentley 2000, 425), 일본서기에서 이를 찾을 수 없다. 일본서기 색인(大野達之助 1976, “日本書紀索引”)에도 포함되어 있지 않다.
  • 우데게어 muje ‘천장을 받치는 가로 기둥’도 Cincius(1975)의 목록에 있지만, 음성학적인 이유로 다른 퉁구스어 낱말들과는 동계어가 될 수 없을 것으로 보인다.

(13) 백제어 syema(セマ, 斯麻) ‘섬’(일본서기 권 19, 368; 권 16, 6; 권 17, 22). Bentley는 “명백한 동계어로 중세 한국어 syem R과 일본어 sima LL ‘섬, 영토’(Bentley 2000, 426). 이는 한국-일본어족이 언어동조대가 아닌 유효한 계통적 단위라는 것을 지지하는 언어학자들에게 사실상 동계어로 인정되고 있다(예컨대 Whitman 1985, 234). 그러나 문제가 하나 있는데, 일본어 sima는 동계어라기보다는 차용어로 보이기 때문이다. 고대 서부 일본어 sima는 류큐어에서 충분히 확인되는 동계어가 있다(平山輝男 1966, 351; 1967, 334). 고대 동부 일본어 sima도 세 번 출현하는데(만엽집 권 14, 3367; 권 20, 4355, 4374), 이 시들 중 하나는 전형적인 고대 동부 일본어의 모습을 하고 있지 않다. 따라서, 이 낱말을 일본조어의 어휘 항목으로서 다루는 것에는 전혀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러나, 한국어 측면에서 이 비교에 필요한 조건으로, 이기문(1958; 1959)에서 제안한 바 있는, 한국조어 *i > 중세 한국어 /ye/와 같은 변화가 일어났다고 가정해야 한다. 그러나 이기문의 가정은 대부분 의심스러운 특징을 지닌 외부 자료에 기반을 두고 있기 때문에, 한국-일본조어 동계어를 수립할 목적으로서는 믿을 만하지 못하다. Whitman도 중세 한국어 /ye/ : 고대 일본어 /i/를 모음 대응에 포함시키지 않았다(Whitman 1985, 129). 따라서, 이 대응은 불규칙적이며, (한국어와 일본어가) 한반도에 상호 공존하였던 시기의 차용어로서 다루어야 할 것이다. 한국어사에서 *i>/ye/의 변화를 가리키는 강한 내부적 증거가 나타나지 않는 한, 차용은 한국어에서 일본어로 진행되었음이 틀림없다. 아마도 이 낱말은 일본조어 *sema로 차용된 후, *e와 *i의 합류가 일어났을 것이다. 설단음 뒤에서의 *e와 *i의 합류는 일본어족의 모든 변이형들에서 전형적으로 일어나는 변화이다.

  • 가타카나 표기 セマ는 일본어 전사 자료에서 나타나지만, 斯麻는 지금은 전하지 않는 백제신찬(百濟新撰; 원문에서는 백제신선으로 잘못 읽음 - 역주)을 인용한 것에서 나타나므로 일본이 아닌 백제의 정서법을 보여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렇지만 둘 다 개략적으로 같은 음가를 나타내는데, 斯麻의 전기 중고음이 /syema/이기 때문이다.

(14) 백제어 koni(コニ) ‘큰’(일본서기 권 9, 257; 권 11, 310; 권 14, 377; 권 24, 190, 197). 고노는 이 낱말을 현대 한국어 관형사형 큰과 비교했고(河野六郞 1987, 79), Bentley는 또한 중세 한국어 khu-에서 ‘*huku-를 재구할 수 있을 것’이라는 사실을 기반으로 중세 한국어 관형사형 ha-n ‘많은’과의 비교를 추가했다(Bentley 2000, 426). 그러나, 그의 ‘재구할 수 있을 것’이란 말은 명백히 과도했는데, 이기문(1991, 18)에서 보인 것과 같이 중세 한국어 khu-n은 사실 전기 중세 한국어 huku-n(黑根)에서 온 것이다(계림유사 #348). Bentley는 “중세 한국어 ha-와 khu-는 둘 다 이 백제어 낱말과 여기서 설명될 수 없는 복잡한 방식으로 관련되어 있다. … -ku- 부분과 ha-는 백제어 *kəni와 관련되어 있을 것이다.”라고 주장한다(Bentley 2000, 426). Bentley가 어떻게 huku-를 *hu-ku-로 분할했는지는 불명확한 채로 남아 있으며, 이때 *hu- 부분은 무슨 뜻인지 이해하기 힘들게 된다. 이 임시방편적인 분할에 더해, 중세 한국어 ha-와 전기 중세 한국어 huku- ~ 중세 한국어 khu-에서 모음의 차이를 설명해야 한다. 요컨대, 이 낱말은 어원적으로 조화될 수 없으며, 한쪽을 선택해야 한다. 저자는 고노의 해답이 맞다고 보며, 백제어 koni와 중세 한국어 khu-n H을 비교해야 할 것이다. (고노가 왜 현대 한국어형만을 인용했는지는 명확하지 않다.) 여기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다. 먼저, 백제어 koni의 모음은 중세 한국어 ha-보다는 khu-와 더 잘 맞는다. 둘째, 의미론적으로도 khu-와 더 잘 맞는다. 셋째, 어두 유기음의 발달에 관해 백제어가 중세 한국어보다 혁신적이고 전기 중세 한국어보다 덜 고어적일 수 있다는 생각, 다시 말해 아직 중세 한국어에서 일어나지 않았던 huku- > khu-와 같은 변화가 백제어에서 몇 세기 전에 이미 일어났을 수 있다는 생각에 반대할 이유가 없다. 고대 일본어 화자들은 k-와 kh-를 구분하지 못했다.

  • 고대 서부 일본어에서의 /kô/와 /kö/의 구분은 적어도 /kô/와 /kö/를 일관되게 구분하고 있는 마지막 문헌인 고금화가집(古今和歌集)이 편찬된 921년의 중기 일본어까지 살아남았다. 당시에 고대 서부 일본어의 /kî/와 /kï/의 대립이 사라졌기 때문에, 한국어 중설고모음 /u/는 중설중모음 /ö/로 적는 수밖에 없었다. 이는 역시 /ï/가 없었던 근고 한어 화자 손목(孫穆)이 계림유사에서 전기 중세 한국어 huku-n을 黑根/həikən/으로 적은 것과도 같다.

(15) 백제어 kaso(カソ, 柯曾) ‘아버지’(일본서기 권 17, 26). Bentley는 이 낱말은 고대 일본어 kasö ‘아버지’로도 발견된다고(일본서기 권 14, 376) 주장하였다(Bentley 2000, 436). 그러나, 이것은 오직 고대 서부 일본어와 중기 일본어에서만 발견되고 고대 동부 일본어나 류큐어에서는 확인되지 않는다. 고대 서부 일본어로 ‘아버지’를 뜻하는 낱말은 일본어족 전체에서 확인되는 titi도 있다는 사실에서, 고대 서부 일본어 kasö는 백제어에서 차용된 형태로 다루어져야 한다(Vovin 2004).

(16) 백제어 nyerim(ネリム, ニリム, 二林, 爾林) ‘주군, 주인, 왕’(일본서기 권 14, 368; 권 16, 7; 권 19, 75; 권 20, 109). 고노와 Bentley는 모두 이 낱말을 중세 한국어 nim R < *nilim과 올바르게 대응시켰다(河野六郞 1987, 76; Bentley 2000, 426). 또한 신라 왕에 대한 칭호 nirin(ニリン)도 어휘집에 가타카나로 실려 있다(일본서기 권 6, 177).

(17) 백제어 kopori(コフリ, コホリ, 己富里) ‘고을’(일본서기 권 17, 27, 32). 고노와 Bentley는 모두 이 낱말을 중세 한국어 koWol LL, koGwolh LL, kwoGwolh LL, kwoGulh LL과 올바르게 대응시켰으며, 고대 서부 일본어 kopori로 차용된 것도 확인하였다(河野六郞 1987, 84; Bentley 2000, 425).

  • kwoGwolh LL은 cwokhoWol ‘조(millet) 고을’ < *cwoh-koWol ‘조+고을’(용비어천가 권 2, 22b)이라는 딱 한 번만 쓰인 낱말 형태로 확인된다.

(18) 백제어 sitoro(シトロ) ‘허리띠’(일본서기 권 15, 412). 고노와 Bentley(고노를 참고함)는 모두 이 낱말을 중세 한국어 stuy H ‘띠’와 올바르게 대응시켰다. 고노는 나아가 중세 한국어 stuy는 거성이지 상성이 아님을 언급했음에도 조어형이 *s(i)’tuli였을 것이라고 제안하였다(河野六郞 1987, 77). 이는 그리 어렵지 않는데, 한국조어 *situri LHH를 상정했을 때 첫 음절 모음의 탈락을 통해 중세 한국어 stuy H를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2a. 백제어로 된 텍스트?

신라 향가 속에 백제어로 된 텍스트가 있다. 서동요(薯童謠)를 말하는 것인데, 관련된 삼국유사 기사와 향가 본문은 다음과 같다.

聞新羅眞平王第三公主善花美艶無雙。剃髮來京師。以薯蕷餉閭里羣童。郡童親附之。乃作謠誘·羣童而唱之云。
신라 진평왕(眞平王)의 셋째공주 선화(善花. 혹은 善化)가 뛰어나게 아름답다는 말을 듣고는 머리를 깎고 서울로 가서 마을아이들에게 마를 먹이니 이내 아이들이 친해져 그를 따르게 되었다. 이에 동요를 지어 아이들을 꾀어서 부르게 하니 그것은 이러하다. (한국어 번역 출처)
善化公主主隱 他密只嫁良置古 薯童房乙夜矣卵乙抱遣去如
SENHWA KWONGCWU NILIM-un // NOM KUSUk-i El-a TWU-kwo // SE-TWONG-PANG-ur PAM-Ohi ALH-ur AN-kwo KA-ta-pi
선화 공주 님-주제화 // 남 숨기다-부사형 결혼하다-부정형 두다-동명사형 // 마-소년-?-대격 밤-속격/장소격 알-대격 안다-동명사형 가다-직설법-한정형
선화공주님은 남 몰래 결혼해 두고 맛동방을 (밤에 - 역주) 알처럼 안고 간다. (서동요; 삼국유사 권 2, 27b9-28a2)

이와 같이 우리는 여기서 백제에서 온 젊은이가 지은 노래를 다루고 있는데, 그 젊은이는 신라의 수도 경주에 와서 현지 소년들에게 노래를 알려주어 시내 거리마다 부르게 하였다. 그 노래는 신라어로 만들어졌는가, 백제어로 만들어졌는가? 확률은 50 대 50이지만, 최소한 그와 현지 소년들이 소통할 수 있었음은 명백하다. 그러나 신라어에는 없어 백제어라 생각할 만한 특징이 하나 있다.

서동요는 579년 ~ 632년 사이에 지어진 것으로 추정되는, 가장 오래된 향가 두 편 중 하나로 여겨진다(홍기문 1956, 28). 만일 그것이 신라어로 쓰였다면, 시에서 두 번 사용된 대격 표지가 乙 /ur/로 쓰였다는 사실과 합치되지 않는다. 乙은 대격 표지로서는 균여향가와 도이장가에서만 쓰인다(칭찬여래가 6; 광수공양가 2; 참회업장가 2; 청전법륜가 8; 청불주생가 3; 도이장가 1 등). 반면에 (서동요의 눈에 띄는 예외를 포함한) 나머지 신라 향가에서는, 대격 표지는 일관되게 肹/Gur/로 적히고 있다(헌화가 3, 4; 안민가 5, 6, 7; 찬기파랑가 8; 도천수관음가 1, 5, 7; 혜성가 2). 같은 글자 肹/Gur/이 균여 향가에서는 대격 표지로 딱 한 번 출현한다(칭찬여래가 7). 곧, 여기서 같은 표지의 시간적인 변이형 두 개를 다루고 있는 것임이 틀림없으며, -Gur>-ur의 변화 과정이 예상된다(Vovin 1995, 229). 알려진 최고(最古)의 향가인 서동요에서 -Gur이 아닌 -ur이 쓰였다는 것은 -G- > -∅-의 변화를 이미 거친 다른 방언형이라 설명하는 것이 가장 합당할 것이다. 이 해석은 肹/Gur/은 삼국사기에서 백제 고유명사 표기에서 나타나지 않지만 乙/ur/은 나타난다는 사실을 통해 더 강화된다(송기중 2004, 770-71).

따라서 위의 제안이 옳다면, 머지않아 백제 무왕이 된 서동이 구사했던 백제어는 한국어였던 것이 된다. 위의 시가 다양한 해석의 방을 남기고 있지만, 명명백백한 것은, 그 언어는 일본어가 아니라 한국어였다.

결론

따라서, 위에서 제시한 모든 증거들을 기반으로 “삼국시대에 한반도에서 말해진 언어는 몇 개인가?”라는 질문에 간단히 답할 수 있다. 오직 고대 한국어 하나였으며, 백제와 고구려에 지역 방언이 있었던 것이다. 이는 한반도에서 한때 일본어족이 말해진 적이 있긴 하지만 기층언어(substratum language)가 되었다는 사실과 충돌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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